▲북한 망명 생활을 거친 시아누크 국왕의 영향으로, 프놈펜 시내에는 아직 김일성 거리가 남아있다.
Widerstand
그러나 미국이 사주한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 내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힘은 점점 강해졌습니다. '캄푸치아 공산당', 즉 '크메르 루주'는 1973년이 되면 캄보디아 영토의 60%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미국이 남베트남 철수를 결정하자 론 놀 정부 역시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1975년 4월 17일, 남베트남이 함락되기 보름 전에 론 놀의 크메르 공화국은 프놈펜을 빼앗기고 붕괴했습니다. 시아누크는 한때 크메르 루주를 탄압했던 장본인이었지만, 론 놀을 축출하기 위해 크메르 루주와 연합했습니다.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을 장악하자 시아누크도 캄보디아로 돌아왔죠. 하지만 시아누크는 1년 만에 모든 실권을 잃고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습니다.
크메르 루주는 1976년 1월 '민주 캄푸치아'라는 정부를 만들고 자신들의 구상에 따라 국가체제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도시민은 농촌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전화와 우표의 사용을 금지하고, 화폐제도까지 폐지하려 했습니다. 원시 공산주의 사회로의 복귀를 추구한 것이지요.
도시민은 차별의 대상이, 곧 학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식인 계층 역시 처형 대상이 되었고, 과거 정부 기관에서 일했던 관료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구 600~700만의 캄보디아에 최대 2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갖가지 이유로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어린아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의사도 교사도 사라졌습니다. 사회의 중추를 이루는 중산층과 지식인 계층이 캄보디아 사회 전체에서 축출되고 처형되는 끔찍한 학살극이 이어졌습니다.
크메르 루주가 벌이고 있는 학살극은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외국에 거주하고 있던 캄보디아인 가운데에는, 내전과 군부독재의 종식에 희망을 품고 새로운 캄보디아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 자발적으로 귀국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외국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 언급했던 것처럼, 이 학살극은 1979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정치범 수용소가 된 고등학교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뚜얼슬렝 대학살 박물관'은 킬링 필드 당시 'S-21 보안감옥'으로 불렸던 정치범 수용소였습니다. 2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이 수용소를 거쳐갔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단 12명에 불과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수감되고, 고문당하고, 죽음보다 못한 삶을 견뎌내다 못해 끝내 죽어 캄보디아 곳곳에 암매장되었습니다.
혁명의 이름을 쓴 학살만을 목적으로 했던 이 수용소는, 수용소로 쓰이기 전에는 평범한 고등학교였습니다. 아이들이 배구를 하던 운동장에서는 공공연히 물고문이 이루어졌습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던 자리에는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로 반혁명적'이라 주장하던 비밀경찰이 들어섰습니다. 새로운 캄보디아를 위한 꿈은 그렇게 산산이 부서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