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대기 중인 승객과 그림을 그리러 온 어반스케쳐들.
리피디이승익
인천 국제 공항이 넓긴 넓다. 많은 스케쳐들이 왔지만 전부 흩어져서 잘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공항 보안 요원들의 눈에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보안) 훈련의 기본적인 목표는 모든 인간을 항공기 폭파범 후보자로 보는 것이었다. 새로 알게 되는 사람과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으려고 하는 우리의 관례적인 충동을 완전히 뒤집는 셈이다. (중략) 적(敵)은 사과주스 통을 들고 어머니의 손을 잡은 여섯 살짜리 소녀일 수도 있고,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취리히로 날아가는 노쇠한 할머니일 수도 있다. (93쪽)
보안 요원의 직업윤리는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것이니까, 보안팀의 우려도 이해는 간다. 어반스케쳐스 운영진과 공항 보안팀의 협조로 행사는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하긴 공항에서 어반스케치 행사는 전례가 없었다고 하니 서로 당황할 만도 한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도 그의 공항 사랑을 노골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아마도 히드로 공항 관계자들이 그 책을 읽고 그에게 아예 공항에 상주하면서 공항에 관한 책을 써달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일주일간의 공항 상주작가를 수용한 이유는 이렇다.
공항 터미널은 현대 문화의 상상력이 넘쳐나는 중심이다. 만약 화성인을 데리고 우리 문명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깔끔하게 포착한 단 하나의 장소에 데려가야 한다면, 우리가 당연히 가야 할 곳은 공항의 출발과 도착 라운지밖에 없을 것이다. (16쪽)
만약 지금이 20세기 초였다면 보통은 그 화성인을 기차역에 데려갔을 것이고, 배로 해외여행이나 이주를 해야 했을 때는 그들을 항구로 데려갔을 것이다. 우주여행이 되기 전까지 그 역할은 공항이 할 것이다. 공항은 세상의 축소판이니까.
나는 원래 공항 대합실에서 대기 중인 각양각색의 승객을 그리려고 했다. 그런데 공항의 설계와 의자의 배치가 대기중인 승객을 그리기에 적합하지 않게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의자와 의자 사이가 멀거나 마주 보고 있다.
승객을 그리려면 갖고 다니는 간이 의자에 앉으면 되겠지만 너무 눈에 띄어 곧 제지당할 것 같다. 결국 승객들을 실루엣으로 간단하게 그렸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여러 곳에서 온 스케쳐들과 수다를 떠느라 기사에 쓸 만한 사진을 찍지 못했다.
그래서 15일 다시 공항에 갔다. 그러데 이번에도 마땅히 그릴 곳을 찾지 못해서 공항순환버스를 타고 2 터미널로 갔다. 2 터미널에는 처음 가보는데 버스로 10분 정도 걸리는 먼 거리라서 놀랐다. 2 터미널로 가는 길에 창밖에 보이는 황량한 풍경이 너무 좋다. 특히 2 터미널에는 전시장과 전망대가 따로 있었다.
전시장은 공항 배치 모형도와 지도가 있어서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잘 알 수 있게 되어 있고 전망대에서는 계류장에 대기 중인 비행기가 잘 보인다. 계류장 풍경을 그리면서 생각했다. 올해는 저 비행기를 타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알랭드 보통은 종종 세상의 축소판인 공항에 여행간다고 한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인천 국제 공항이 좀 멀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