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현(가명)이가 6.25 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을 주제로 수업하고 있는 모습. 프레젠테이션 화면에 참혹한 학살의 현장을 보여주는 사진이 띄워져 있다.
서부원
그는 노근리 사건은커녕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조차 처음 들어봤다고 했다. 해방 후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사건 중 아는 거라곤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뿐이라고 말했다. 개정 전 교과서에서도 이 두 사건은 '남한 사회의 혼란'이라는 제목으로 몇 줄 언급됐었다.
그가 준비한 프레젠테이션 화면에는 학살당한 주검들이 널브러진 흑백 사진으로 가득했다. 이야말로 전쟁의 본질이라며, 발생한 날짜와 지역명, 또 이름만 봐서는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단체를 끌어와 사건을 명명하는 건 온당치 않다고 말했다. 이름 뒤에 민간인 학살 사건임을 명토 박아야 한다는 거다.
그는 이번 특강이 '맛보기'일 뿐이라고 겸손해했다. 앞으로도 교과서가 간과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제대로 공부한 뒤, 늘 그래왔듯 친구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적게는 수만 명에서, 많게는 수십만 명이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학살당한 사건을 고작 한두 줄로 끝낸다는 건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라고 다짐하듯 말했다.
그가 따로 만들어온 자료에는 개봉한 지 30년 가까이 지난 영화 <태백산맥>의 장면들까지 삽입돼 있었다.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이유에 대한 친구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고 했다. 남과 북이 서로 보복 양상으로 치닫고, 친일 부역자들이 자신들의 죄과를 세탁하기 위해 가세하면서 학살이 더욱 만연됐다는 추론까지 내놓는 모습에서 학자적 면모가 물씬 풍겼다.
한편, 강준(가명)이는 수학을 진정 '사랑하는' 아이다. 수학을 잘한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와 견줄 만큼 수학 성적이 높은 친구야 여럿이지만, 그만큼 수학에 '진심'인 아이는 교직 생활 25년 동안 만나질 못했다. 수학을 공부할 때는 배고픔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말 그대로 '괴물'이다.
그의 꿈은 수학 교사다. 수학을 싫어하고, 일찌감치 수학 공부를 포기하는 아이들에게 수학이 얼마나 재미있는 학문인지 교사가 되어 보여주겠다며 벼르고 있다. 가르치고 설득하는 게 너무 행복하다면서, 중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곁눈질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강준이의 비유... 한국의 수학 공부=징병제
강준이는 만에 하나 임용시험을 통과하지 못해도 결단코 수학 교육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학교 교사면 어떻고 학원 강사면 어떻냐는 거다. 수학의 재미만 일깨워줄 수 있다면, 일하는 곳이 어디이고 수입이 얼마든 괘념치 않겠다고 잘라 말하는 천생 '수학의 덕후'다.
얼마 전 그도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빌려 친구들 앞에서 한 시간짜리 '특강'을 진행했다. 전 세계 여러 나라 청소년들의 수학 선호도를 비교하며, 우리나라 수학 교육의 현실을 초중고 학교급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수학을 싫어하면서도 성적은 상위권인 통계를 문제 삼은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수학 공부를 징병제에 비유했다.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병역 의무를 이행하듯 공부한다는 뜻이다. 대학입시가 끝나면 가장 먼저 폐지함에 버려지는 게 수학 문제집이라면서, 일단 제대하고 나면 군대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심리와 비슷하다는 거다.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게 수학인데, 학생들은 눈앞의 시험 성적에 대한 불안 탓에 어려서부터 찬찬히 생각하고 따져볼 여유를 잃어버렸다고 분석했다. '교육은 기다림'이라는 금언은 수학 교육에 꼭 들어맞는 말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하물며 등급을 나누고 줄 세우는 시험은 수학 교육을 망치는 주범이라고 연신 강조했다.
놀랍게도 그는 수학만 잘하는 게 아니다. 다른 과목들조차 압도적이라 할 만큼 성적이 우수하다. 학년말 내신 등급을 보니, 숫자 '2'가 드물 정도다. 다만, 국어와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건 수학 관련 논문을 읽기 위해서고, 사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다양한 사회 현상을 수학적 도구를 써서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교사로서 지현이와 강준이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게 즐겁다. 학생과 교사로 만난다는 느낌보다도 막역한 친구와의 만남 같다. 대화가 무르익노라면 마치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사이인 양 착각이 들 정도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교학상장', 가르치고 배우면서 성장한다는 말을 새삼 가슴에 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