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감옥(뒷날 대구형무소로 개칭) 정면의 모습. 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보다 더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에서 순국했다.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그 시절 광주와 대구 사이에는 지금과 같은 고속도로가 없었다. 의병장들은 포승줄에 묶인 채 광주에서 영산포까지 걸어가서 영산강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간 다음 여객선을 타고 부산으로 갔고, 다시 기차로 대구까지 기차로 호송되었다. 이후에 유족들은 교수형당한 의병장들의 시신을 어떻게 운구했을까? 시신을 대구에서 고향까지 모셔올 때 겪어야 했던 그 고생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을까?
한편으론 대구가 참 부러웠다. 광주에는 '광주형무소 표지석' 하나 달랑 있을 뿐인데, 대구는 대구감옥의 현장을 이나마 복원시켜 놓았다. 바로 뒤편에는 삼덕교회가 있었고, 교회 입구엔 이육사 기념조형물이 보기 좋게 서 있었다. 참 부러웠다.
이어 우리는 대구 중심가로 발길을 옮겼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의 고택이 눈부시게 다가왔다. 고택 안에는 이상화를 회고하는 여러 기념물이 아기자기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나는 절로 읊조렸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는 사이로". 이상화 시인은 대구 출신으로 국채보상운동의 선구 서상돈의 집이 바로 이상화 고택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다. 나는 이런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다음 우리는 김광석의 거리로 이동했다. 김광석이 대구에서 산 것은 다섯 살까지란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명지대학교를 나왔으니 김광석을 대구 출신 가수라고 보기 힘들지만, 대구에는 김광석을 추모하는 예술의 거리가 멋들어지게 조성되어 있었다. '문화 수도'라고 부르는 광주에는 왜 이런 거리가 없을까?
안동에서 만난 권오설의 철관
이튿날 버스가 우리를 싣고 간 곳은 안동이었다. 안동 오미리 마을. 그곳엔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를 지낸 김재봉 선생의 생가가 있었다. 생가 앞에는 김재봉의 정신을 새겨 넣은 바윗덩어리가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다.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함'. 안동은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 선생을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로 모시고 있었다.
오미리 마을은 전체가 역사 유적지였다. 마을 언덕을 오르니 오미리 출신 항일운동가를 기리는 기념탑이 우뚝 서 있었다. 노성태 선생은 김보섭 표지판을 가리키면서 "김보섭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앞장을 선 광주고보 학생이었음"을 힘주어 설명하여 주었다. 달빛역사동맹의 필연을 현장에서 보고 있었다.
버스는 그 유명한 독립운동가 이상용의 고택 임청각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불도저가 보이기도 하고 좀 수선스러웠는데 알고 보니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곧장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으로 달려갔다.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들어서면서부터 심상치 않았다.
입구에 독립운동가의 지역별 숫자를 적은 통계표가 있었는데, 경북 출신이 전국 최고란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감옥에 갇힌 독립운동가의 수로 보면 전라도가 최고였는데 허허…. 아직까지 독립운동기념관 하나 없는 내 고장 빛고을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빛고을엔 언제나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이 오시려나.
이육사의 '광야'를 형상화한 영상물이 우리를 압도했다. 돌아서니 조선공산당 1차 사건을 알리는 동아일보가 전시관 유리창 너머에서 우리에게 김재봉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 옆에는 박열과 후미코가 한복을 입고 판사들 앞에서 당당하게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진술하는 현장이 모형으로 생생하게 재현돼 있었다.
6·10만세운동의 주역은 권오설이었다. 고려공청의 1차 책임비서를 맡은 박헌영이 체포, 구속되자 권오설은 고려공청의 2차 책임비서를 맡았다. 권오설은 6·10만세운동을 이끈 조선공산당의 맹장이었다. 그런데 전시관에는 권오설의 철관이, 78년 만에 온전히 땅 속에 묻힌 권오설을 옥죄던 녹슨 철관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권오설의 철관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