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나무 1
이정희
한참 울긋불긋할 나이
한동안 방송가는 물론 각종 강연계를 회자하던 김정운 박사를 이제 우리는 자주 만날 수가 없다. 헬기를 타면서까지 일정을 다니는 그는 오십 대 중반 이른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을 배우고, 책을 썼다. 그는 말한다. 아마도 계속 살았더라면 정가를 전전했을 텐데, 일찍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서 참 다행이라고.
김정운 박사의 책에서 저런 내용을 읽고 지금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시간의 의미들을 또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얼마 전 파킨슨 병 투병을 하시는 이모부님께서 입원을 하셨다. 그러나 머지 않아 이모부님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셔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모님 때문이다.
이모부의 파킨슨 병 투병 이후 하루 종일 남편과 함께 지내시던 이모님은 홀로 남겨진 시간을 버거워 하셨다. 멀리 지방에 사는 딸네 집에 오라고 해도 싫다, 어디 문화센터라도 다니시라 해도 싫다, 그저 퇴원하실 이모부님만을 기다리며 하루를 우두커니 보내고 계셨다. 이모님은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자신의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어 보이셨다.
나 역시도 그랬다. 홀로 지내며 가장 힘들었던 건 나 자신으로 살아내는 것이었다. 그건 그냥 밥을 혼자 먹을 수 있다거나, 혼자 뭘 한다거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꺼이 겨울을 지내기 위해 단풍을 떨구는 나무처럼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정체성을 벗어나 나라는 주체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밥 반찬 하나를 해도 다른 사람들을 배려(?) 한다면서 살아온 시간들이 쉬이 나라는 중심으로 새로 형성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이제는 나무를 보며, 인생무상으로 고개를 떨구는 대신, 잎들을 떨구며 홀가분해하지 않을까 하고 시선의 변화를 가져오는 수준에는 이른 건가 싶기도 하다. 살림 작파하고 이 나이에 뭔 팔자여, 하는 대신 기꺼이 잎을 떨구는 나무를 본받아 보기로 했다.
매일매일 걸어서 오고가다 보니 그 짧다는 가을이 길게 느껴진다. 잠시 울긋불긋하다 지는가 싶은 낙엽들이 그 짧은 시간 저마다 최선을 다해 붉어지고 노래지는 걸 보게 된다. 아직은 한참 울긋불긋할 나이, 최선을 다해 물들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러고 자신을 독려해 본다.
단풍이 뭐라고, 낙엽이 뭐라고 거기에 그리 의미 부여를 하는가 싶겠다.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가진 능력을 '스토리텔링(Storytelling)에서 찾는다. 보여지는 사물에 저마다 의미부여를 해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내는 것이 인간 종족의 장점이고, 그 장점이 인류의 장대한 문화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 장대한 스토리텔링을 꼭 뭐 정치, 사회, 문화에만 쓸 일이 있는가. 나 사는데, 내가 나로 살아가는데 단단해지기 위해 좀 쓰면 어떤가 싶다. 그래서 나는 떨어지는 낙엽 대신, 의연한 나무를 본다. 그리고 짧은 가을이 무색하게 봄날의 꽃보다도 더 화려한 비주얼을 뽐내는 단풍들을 본다.
따지자면 봄날의 꽃도 무상(無常 덧없음)이고, 가을날의 단풍도 무상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다 무상이다. 하지만 그 무상의 시간을 저마다 최선을 다하는 것도 살아있는 것들의 몫이자,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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