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1호 목마장이 들어선 수산평. 가운데 멀리 보이는 높은 봉우리는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오름인데, 대수산봉 사이에 드넓은 수산들이 펼쳐진다.
이봉수
기황후가 최초로 말 160필 보낸 건 와전된듯
일부 문헌과 언론에서는 말 160필을 보낸 이가 원나라 순제의 총애를 받은 기황후라고 주장하는데, 문헌 조사를 해보니 연대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기황후설의 근거가 된 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다. 서거정의 '제주목 관덕정 중수기'에 기황후가 목장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또 <탐라성주유사>에는 1300년에 기황후가 수산평에 목장을 설치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기황후가 황후가 된 것은 1340년이어서 <탐라성주유사>의 1300년과는 40년 이상, <동사강목>의 1276년과는 무려 64년 이상 햇수가 어긋난다. 아마도 원나라가 1276년에 말 160필을 보내 수산평에 목마장을 처음 개설한 역사적 사실이 후대에 기황후가 목마장을 설치한 행적과 결합돼 기황후가 처음으로 말 160필을 보낸 장본인으로 와전된 듯하다.
기황후는 기자오의 딸이면서 공녀로 원나라에 가서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기황후는 '몽고인 말고는 황후를 삼지 말라'는 가훈을 깰 만큼 재색이 뛰어나고 모국에 관한 '애정'도 특별했던 듯하다. 그는 목마장을 두는 한편으로 지금 제주시 외도1동에 수정사를 세워 불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오빠 등 기씨 일족이 국정을 농단하다가 공민왕에게 주살되면서 복수극으로 치달았다. 고려 출신 최유로 하여금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고려를 치게 했다가 최영 장군에게 대패했다.
탐라인에겐 너무나 가혹했던 말 기르기
말 양육은 탐라인에게 가혹한 공역(貢役)이었고 농경지를 침탈하는 문제도 있었다. 농경지 주변에 밭담을 쌓고 무덤 주변에 산담을 쌓은 것은 탐라인의 자구책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올레길을 비롯한 아름다운 제주 풍경의 핵심 구성요소가 되었으니 인간의 행위가 어떤 결과로 귀착될지는 알기 힘들다.
탐라는 섬이어서 말이 도망갈 염려가 없고 말을 잡아먹을 수 있는 맹수도 없었다. 말떼와 소떼는 우두머리 마소의 인도에 따라 오름 등성이에서 풀을 뜯다가 분화구에 고인 물을 마시곤 했다. 제주의 민속과 생활사를 깊이 연구한 김순이 시인의 <그리운 제주 풍경 100>에는 태풍이 오면 마을의 말떼와 소떼를 몰고 곶자왈에 가서 풀어놓았다고 한다. 짐승들은 본능적으로 안전한 곳으로 피했다가 태풍이 끝나면 돌아온다는 것이다. 자연재해에는 인위적인 방비보다 자연의 이치와 동물의 본능을 잘 이용하는 지혜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