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아로 수용소의 사형대프랑스 식민정부는 잔인한 탄압을 일삼았는데 그 중 하나가 단두대를 이용한 사형이었다.
운민
하노이에서 마지막으로 가볼 장소는 서울의 서대문형무소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자들이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고 고문했던 호아로 수용소를 찾아가 보기로 한다. 프랑스인들에 의해 건설된 이후 베트남 전쟁까지 쓰였던 교도소는 그 역할을 다하고 박물관으로 탈바꿈해 하노이를 찾는 사람들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원래 이곳은 목재와 석탄 등 난방을 하기 위한 연료를 공급하던 호아로(화로) 거리가 있던 곳이라 그 명칭이 굳어진 것이다. 이곳은 프랑스인들의 거주구역인 프렌치 쿼터에서 멀지 않아 그들에게 위험했던 정치범, 독립운동가를 집중적으로 수용하기 용이했다.
이곳의 정식 명칭인 메종 센트럴이라 적혀 있는 호아로 수용소는 겉으론 평범해 보였지만 내부의 철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그들의 열악했던 생활이 한눈에 펼쳐졌다. 원래는 460명을 수용했지만 1954년에는 2000명의 인원을 한꺼번에 들어갔다고 하니 밀랍인형으로 재현된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들은 발에 족쇄가 채워진 채 가축들보다 못한 열악한 생활을 해야만 했고, 수십 명이 쳐다보이는 단상에 가림막 없는 화장실을 설치해 놓아 수치심이 절로 들게 만들어 인간다운 취급을 하지 않았다. 이처럼 프랑스가 일본 못지않게 베트남 독립을 집요하게 탄압했던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흔적이 수용소 곳곳에 널려 있었다.
이 수용소에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을 모아놓은 감옥도 위치해 있는데 어린아이들을 함께 데려와 함께 수감 시설을 보냈던 장면을 재현했다. 가장 안타까운 장소는 맨 구석에 위치한 사형대다. 기요틴이라 불리는 단두대의 실물과 프랑스 관리가 처형된 사람의 목을 들고 웃고 있는 사진을 함께 보니 인간의 잔혹성이란 과연 어디까지인가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베트남 독립 이후 북베트남 지도부는 아픈 흔적이 남은 이곳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들의 수용소로 쓰기도 했다. 미군들은 그곳에서 체스를 두기도 했고, 담배도 피울 수 있었다고 하니 나라의 국력에 따라 포로 대우도 달라지는 것 같다. 미군들은 자조적으로 이곳을 '하노이 힐튼'이라 불리었다 한다.
호아로 수용소는 이제 아픈 역사를 뒤로 하고 아픈 역사를 말없이 전해주는 하나의 현장으로 남아 전 세계 곳곳에서 반드시 찾아야 하는 교훈의 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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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팟케스트 <여기저기거기>의 진행을 맡고 있습니다. obs라디오<굿모닝obs>고정출연, 경기별곡 시리즈 3권, 인조이홍콩의 저자입니다.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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