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딘광장의 근위병 교대식바딘광장에서는 정시마다 근위병 교대식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제식은 엄숙함보다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운민
1918년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베르사유 회의에서 응우옌 아이 꾸옥이란 이름으로 참가해 베트남인의 자유, 민주, 평등권을 요구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이는 독일, 오스트리아 등 패전 국가를 분할하기 위한 의도였고,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지지해줄 명분이나 이유가 아니었다. 호찌민은 이때 해방은 식민통치세력의 선심이 아니라 무장 투장을 통해 얻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1920년 호찌민은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인사들과 만나 교류하고 서로 협조하기도 한다.
1930년 호찌민과 그의 동료들은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하고 베트남 국내에서의 독립투쟁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간다. 호찌민은 영국 경찰, 중화민국의 군대에 잡혀 옥살이를 하는 고초를 겪지만 해방 직전 미국 OSS에 들어가 베트남의 반일 작전을 펼쳐나간다.
결국 민중봉기에 성공함으로써 호찌민은 베트남 주석으로 선출되어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쉽게 철수할 마음이 없었고 디엔비엔푸 전쟁에서 패퇴할 때까지 참혹한 전쟁이 수년 동안 이어진다. 이후 제네바 협약에 따라 베트남은 남, 북으로 분단되면서 우리가 아는 베트남 전쟁까지가 우리가 아는 호찌민의 일대기다.
호찌민은 나라를 대표하는 지도자 자리에 올랐지만 줄곧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다. 바딘광장의 끝에는 노란색의 외벽이 인상적인 화려한 주석궁이 지금도 자리한다. 이곳은 본래 프랑스의 총독부다. 상당히 호화스러운 곳이지만 호찌민은 이곳을 거부하고 주석궁 옆 연못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거기서 생활했다. 나무 원목으로 지어진 관저는 내부가 다 들어다 보이는 소박한 구조다.
그의 일대기는 산책로를 걸어가면 나오는 호찌민 박물관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전에 오른편의 연못에 한 기둥을 받치고 올라가 있는 조그마한 불당이 보이는데 이곳이 하노이의 국보 1호라 칭해지는 못꼿, 한 기둥 사원이라 하는 장소다. 1049년 리 태종이 연꽃 위에서 관음보살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연꽃 모양을 본떠지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