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와 찾은 속초의 옛 여인숙 골목. 과거 이곳에서 A씨를 비롯한 선원들이 고문을 받았다.
변상철
A씨의 아버지 직업 군인이었다. 속초로 오게 된 것도 부친의 근무지가 속초로 발령되면서부터였다. 부친은 속초에서 2년 근무한 뒤 제대하고, 탄광에서 일을 했지만 얼마 안 가 차량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때부터 가정생활이 어려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엄마가 맹장이 터져서 복막염으로 병원으로 입원해 있고, 형편은 어렵고 하니까 학교는 가기도 싫더라고. 그리고 마침 학교에서도 배 타고 고기 잡으러 가는 건 장려를 했어요. 당시에는 다들 가정형편이 어렵다 보니 그렇게 돈을 벌어서라도 경제도 살리고 학비도 벌면 좋으니까 며칠씩 빠지더라도 배 탄다고 하면 다 이해해주는 분위기였어요.친구 소개로 해부호라는 배를 타게 된 거예요."
해부호가 납치된 것은 새벽이었다. A씨는 멀미로 정신없는 상황에서 선실 밖에서 들리는 멈추라는 소리와 총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나중에 나이 든 선원들을 통해 납치된 장소가 고성 앞바다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학교 다닐 때 북한 사람을 만나면 모두 죽는다고 배웠기에 A씨 등은 모두 벌벌 떨기만 했다고 한다.
북한 장전에서 조사받은 뒤 해주 쪽으로 넘어가 보니 속초 승운호 선원 등이 있었다고 한다. 억류 생활이 길어지자 남한으로의 귀환 요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귀환 요구가 있을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남한으로 돌려보내 주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귀환은 불가능할 것이라며 포기하고 있던 중, 1972년 남북공동성명 발표가 나면서 급진전되었다. 1972년 9월 7일 귀환 당시 기쁜 마음에 승해호를 탔지만 정작 멀미로 인해 어떻게 귀환되었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승해호가 속초항 수협 쪽으로 정박해 하선했지만, 가족들을 만나지 못한 채 곧바로 버스로 태워서 시청 2층 회의실로 이동했다. 조사받았던 곳은 시청 앞 해동여인숙, 저승 같은 곳이었다.
"사실 시청에 와서 누가 나를 부른다 하는 그 순간부터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여인숙에 들어가면 수사관들이 각목을 무릎 사이에 끼우고 꿇어앉힌 다음에 허벅지를 밟더라고요. 무릎이 빠지는 거 같아요. 그리고 눕혀놓고 물고문을 해요, 수건을 얼굴에 덮어놓고 팔다리를 잡고, 한 되짜리 주전자 물을 붓는 물고문을 해요. 그러다가 안 되니까 이렇게 돌리는 군인 전화기 같은 걸로 전기고문을 하더라고요. 전기고문은 의자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당했어요. 나중에 고춧가루 물고문도 당했는데 그건 물고문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당했어요."
A씨가 특별히 고문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 당시 치과 치료를 받은 기간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다. A씨보다 몇 해 전 납북되어 억류되어 있던 매형 등을 만나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었다. 결국 A씨는 고문에 못 이겨 '5년 있다가 북한에 있는 친척들을 만나기로 했다'는 거짓말을 둘러댔다.
허위자백 때문이었는지 고문이 잦아들었다. 경찰 조사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조사받은 것을 말하지 말라는 각서를 쓰게 했고, 결국 검찰과 법원에서도 그 각서로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한다.
집행유예로 나온 이후로 경찰이 계속 따라다녔다고 한다. 담당 형사가 가끔 집에 찾아와 어떻게 사는지 물어보고 A씨가 친한 친구들과 만나기라도 하면 친구들한테까지 찾아가서 조사하기도 했다. 직장생활도 불가능했다. 사회생활이 불가능하게 했던 것, 그것이 제일 괴로웠던 일이라고 한다. 여전히 그는 납북귀환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