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씨가 거주하는 집, 창문이 모두 스프레이 페인트로 짙게 칠해져 밖에서 내부를 볼 수 없도록 해 놓았다.
변상철
납북 후
김씨가 납북되던 당일은 울릉도 지역에서 오징어를 잡고 돌아오던 날이었다. 바다에 안개가 심하게 끼어 있었다. 안개 낀 바다를 보며 친구 서너 명과 함께 선미에 앉아 있던 김씨가 선장에게 "아제비, 여기 어디요?"라고 물었더니 선장이 "저기 보이는 불빛이 '인구 등대'(양양 아래쪽 지역)다"라고 하였다. 안개비가 심해져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 잠시 배를 멈추고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렸고, 선원들은 선실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고 한다. 잠을 자다 소변이 마려워 잠이 깬 김씨는 다음날 부친 생일에 복어를 전하고 싶은 마음에 잠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30분 정도 지났을 때 안개 속에서 불빛이 2~3차례 깜빡이더니 따발총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안개 속에서 갑자기 남한 배가 나타나더니 저희 배에 붙였습니다. 그리고는 도룻지(인민군모자)를 쓴 사람이 총을 들고 나타나더니 밧줄을 우리 배에 던지고는 '빨리 걸우라우, 걸우라우'라고 말했습니다. 저와 선장은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기관장 박정태가 언제 선실에서 나왔는지 기어서 배 선미로 가더니 밧줄을 선미에 걸었습니다. 그리고 북한 군인들이 우리 배를 끌고 갔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 불과 2~3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배는 아침이 되어서야 장전항에 도착했습니다."
북한에 약 1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귀환했다. 당시 억류되어 있던 납북어부 160여 명(북한에서 환송을 할 때 선원대표로 우리 선원 160명은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내용의 답사를 김영수씨가 수일 연습했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한다고 함)과 함께 귀환하였다.
북방한계선 부근에서 한국 함정에 넘겨졌는데 한국 함정은 즉시 어선을 속초항으로 끌고 갔고, 속초항에 도착해서는 경찰에 의해 시청으로 이동했다. 당시 시청에 수용된 선원은 100여 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옆 건물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수사관들은 시청에서 한 사람씩 불러내어 한일여인숙과 현대여인숙에서 조사했다고 한다. 형사들이 바닥에 이불을 깔아놓고 꿇어앉으라고 하더니 북한에서 지령 받은 것에 대해 말하라 했다.
김씨가 지령 받은 것이 없다고 하자, 곧바로 불을 피우기 위해 쌓아둔 장작개비를 가져와 무릎이고 어깨고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팼으며, 주먹으로 뺨을 때리고 온몸을 발로 찼다고 한다. 시청에서 여인숙으로 조사받으러 갈 때는 걸어 나갔지만, 조사받고 시청으로 돌아올 때는 다른 사람 등에 업혀 오거나 전경들이 양팔을 끼고 부축해서 데리고 올만큼 고문으로 녹초가 되었다.
김씨뿐 아니라 여인숙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오랜 기간 수사관들에게 조사를 받은 뒤 속초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후 집행유예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군 입대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김씨는 1975년 10월 12일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 받던 중 보안대에서 호출해 불려갔다. 수사관이 "니가 이북을 갔다 왔으니 이북 사정에 대해 잘 알지 않느냐", "이북에 친척이 있지 않느냐"고 해서 "피난민이라 누구누구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뒤로 몇 번 더 불려갔다. 하루는 사복 입은 사람이 찾아와 "HID라는 것을 들어 봤냐, 너는 군대 못 올 사람인데 우리가 힘을 써서 왔다. 그러니 HID에 지원하라"고 했지만 겁이 나서 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서빙고보안대에서 조사받고 고문 받을 때도 수사 막바지에 '이' 수사관이라는 사람이 "지금이라도 HID에 간다고 하면 이 죄를 모두 다 없애주겠다"고 회유했다고 한다.
훈련소 4주간의 기본 교육을 받고 곧바로 충북 증평에 있는 37사단 사단사령부 군수참모부 행정병으로 배치를 받았다(당시 속초 아야진에 살고 있던 김상기와 함께 배치받았다).
군 복무 중 본부중대장 손모 대위가 김씨에게 장기하사관에 지원하도록 권유했다. 김씨는 납북사건으로 괴롭힘을 당하느니 차라리 군에 있으면 괴롭힘을 당하지 않겠다 싶어서 1976년 3월경 장기복무를 결심하고 하사관에 지원했다. 하사관 교육이 다가오자 당시 병장 서재필이 김씨에게 "조금 있으면 내가 외출을 나가는데 그때 너희 가족이 사고가 났다는 전보를 쳐 줄 테니 청원휴가를 내서 휴가를 다녀와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 서재필은 외출을 나가서 전보를 쳤고, 그 일로 휴가를 받게 되었다. 심지어 선임하사가 하사관에 지원했다며 1주일 휴가증 외에 1주일 출장증을 더 끊어 주었다고 한다.
휴가를 보내며 속초에서 10일 정도 머물렀을 때, 사령부 본부중대에서 사람이 찾아와 '미복귀'라며 37사단 보안대로 연행했다. 휴가증과 출장증을 보여줬지만 소용없었다.
37사단 보안대에서 처음 10일 정도는 편하게 지냈다. 10일정도 지났을 무렵 보안대장 강모 대위가 맥주 한잔을 하자며 불러냈다. 김씨에게 맥주를 권하며 "김 일병, 나한테 솔직히 이야기 할 게 없나, 난 다 알고 있어, 네가 간첩들과 접선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길래, 김씨가 "무슨 말이냐, 그런 사실이 없다"라고 말하자, 소지품을 뒤졌고, 호주머니에 있던 '군인수첩'을 찾아내더니 그 군인수첩에 적혀 있는 친구들 연락처를 보며 그것이 포섭하려는 사람들 명단이라는 것이었다.
강 대위는 김씨의 뺨을 때리고는 "이 새끼, 들어가 자"라고 했다. 김씨가 내무반으로 들어가서 자던 중 새벽에 지프차가 와서 청주시내에 있는 보안대 안가 '청원공사'로 연행해 갔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조사 없이 아침밥만 먹고 서울에 있는 서빙고 분실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