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공회당 건물이 헐리고 새롭게 지어진 마을회관.
김순애
처음 1~2년은,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 중학교는 졸업한 김성수 선생이 학생들에게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다. 그 후에는 고등학교 다니는 이들이 당번을 정해서 가르쳤는데 주간에는 본인들도 학생으로서 학교를 다녀야 했고 저녁에는 부족하지만 성실한 선생으로 마을 아이들을 가르쳤다. 교과서는 없이 그때 그때 선생들이 내용을 만들어서 가르쳤다. 지금 생각하면 학생들보다 기껏해야 서너 살 위인 이들이었고 과목도 국어, 수학 정도였다.
당시에는 상고에 다니던 이들이 마을 학교 선생을 많이 했는데 수학을 가르치면서 주산을 함께 가르쳤다. 6년 정도 주산을 배웠는데 상고생들과 나란히 주산을 할 정도로 그 때는 꽤 잘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동네는 공동으로 비료 대금을 지불했는데 우리가 같이 주산으로 계산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주산을 하라고 하면 다 까먹어서 할 수가 없다.
당시 교사였던 김치종 선생은 방학 때 서울 친척집에 놀러가서 한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안타깝게 물에 빠져 죽었다. 김치종 선생의 시신이 동네에 오자 우리 학생들 모두 가서 3일 동안 시신 옆을 지키면서 꽃을 만들어 올렸다. 당시 여자들은 고등학교 교육까지 시키는 경우가 없다시피 했기에 마을 학교 선생 중에서도 여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선생들은 모두 남자, 학생들은 거의 여자였다.
열일곱에 육지에 일을 찾아 올라가기 전 2년 동안은 동네의 김욱림 선생에게서 천자문을 집중적으로 배웠다. 김욱림 선생 역시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였고 기껏해야 우리보다 서너 살 많았지만 우리보다 조금 더 많이 가진 지식을 나누면서 본인의 배움도 더 자극하기 위해 형의 집 방 한 칸을 내어서 천자문을 가르쳤다. 작은 방에 네다섯 명 정도가 모여 앉아 천자문을 반복해서 익혔다. 덕분에 신문에 나오는 한자는 다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자 실력도 한동안 쓰지 않다보니 다 녹이 슬어서 지금은 한자를 다시 읽으라고 해도 읽지를 못하겠다.
어느날 리서기를 맡고 있던 문자의 아버지가 시에서 보급한 '생활 개선책'이라는 책자를 집으로 가지고 왔다. 문자는 그 책을 아버지 몰래 가지고 와서 우리와 같이 펼쳐보았는데 그 책에는 남자와 여자의 성장 과정이 고스란히 나와 있었다. 우리는 신기하면서도 창피하기도 하고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면서 그 책을 며칠 씩 돌려보았다. 그런데 그만 그 책을 김욱림선생에게 압수당해버렸다.
우리는 그날 내내 선생님 집 울타리에 서서 집안을 빼꼼이 훔쳐보며 선생님이 그 책을 펼쳐보며 어쩌나 걱정했다. 생리 등 여자의 성장과정이 그대로 나와 있는 그 책을 봤다는 사실을 들킨 것만으로도 창피했다. 담벼락에 서서 몰래 선생님의 동향을 살피면서, 혹시라도 선생님 방에 불이 켜져 있으면 '선생님이 그 책을 보고 있구나' 생각하며 우리끼리 얼굴을 붉혔다.
4.3 이후 6년의 시간 동안, 낮에는 밭일을 하거나 산에 가서 나무를 했지만 밤이 되면 꾸벅 꾸벅 졸면서라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마을 학교에 나갔다. 마을 학교는 친구들과 맘껏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공부 반,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 반이었다.
우리는 어쩌다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몇십원 돈을 모아서 '비가'(옛날 사탕)를 샀다. 그리고 우르르 동네 언덕 아래 몰려가서 서로 나눠먹기도 하고 때로는 추운 겨울 날 담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옷을 뒤집어쓰고 그 사탕을 먹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돌이켜 보면 나의 10대 시절을 그나마 제 나이답게 누렸던 시간과 공간이었다.
수다 떨며 함께 배운 천자문... 나무하기·농사짓기 가르쳐 줬던 동네 어른들
낮에는 밭에 가서 일하거나 산에 가서 땔감을 해오면서 조금이라도 집에 돈을 보탰다. 가까운 산은 동네 친구들과 함께 가서 나무를 했고 한라산 입구인 어승생까지 갈 때는 동네 어른들과 함께 갔다. 아마도 동네에서 어른들과 가장 자주 어승생까지 나무하러 다닌 아이는 나일 것이다.
어른들 틈바구니에 껴서 야무지게 나무를 잘한 날은 한 짐 가득 지고 올 수 있었지만, 잘 못한 날에는 초라한 양만 등에 지고 와야 했고 그런 날은 어른들이 내 등에 나무 하나씩 내 짐에 보태줘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어른들은 산에서 구해온 나무들을 도두 오일장이나 시내 장에 가서 팔았지만 내가 마련한 나무들은 집에서 땔감으로 사용하기에도 모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