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희생자 분포지도이호 2동은 4·3직전 222가구에 1,058명이 조, 보리, 콩 등의 농작물을 재배하고 소와 말을 키우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는데 4.3으로 300여명이 희생당했다.
제주도
아버지의 임종 모습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장례식 즈음 마을에 홍역이 돌기 시작했고 홍역에 걸린 막내 동생이 온 몸을 긁어댔던 기억이 선연하다. 동생 또래들이 홍역에 많이 걸렸는데 유독 내 동생만 그 흔적이 얼굴에 고스란히 남았다. 옆에서 바라보기가 힘들 만큼 동생의 몸에는 붉은 두드러기가 돋아났고 모두 아버지 장례식으로 정신없는 사이 동생은 미친 듯이 얼굴과 몸을 긁어댔다.
가려워하는 동생을 어쩌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며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어른들 말처럼 '장례식 같이 부정한 일이 있는 집에 들어온 홍역은 다른 집보다 더 독해서 동생이 저렇게 고통받는구나' 생각했다. 또래들의 몸에 모두 들어갔다 떠나간 홍역은 동생의 얼굴에만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간신히 삶을 이어갔던 어머니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어머니는 거의 넋을 잃은 사람 같았다. 삶에 대한 어떤 의욕도 남아있지 않은 표정으로 맥없이 마루에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집안일에 손을 놓았고 오빠는 야간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제주시내에 나가 자취를 했다.
낮에는 일하면서 생활비와 학비를 벌고 밤에는 학교를 다녀야했던 오빠는 본인의 앞가림하기도 바빴기에 집안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동안 어머니 역할을 대신 해왔던 언니도 없는 상황에서 이제 11살에 들어선 내가 맏딸 역할을 해야 했고 남아 있는 두 동생을 돌봐야만 했다.
어머니와 같이 밭에 나가면 밭담 옆에 몸을 누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농사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나는 동네 어른들에게 들은 풍월로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해가 질 때 즈음 '어머니, 집에 가게 마씀'하며 어머니를 일으켜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지나도 생기를 찾지 못하고 점점 더 허깨비가 되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죽은 이들은 죽은 이들이고 남아있는 자식들 생각해서라도 정신 차리고 살아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도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어 자식들을 키우면서 당시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갔다. 어머니는 죽지 못해 목숨만 간신히 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4.3으로 오빠 셋을 모두 잃고 어머니를 잃고 자식마저 셋이나 잃었다. 그리고 남편마저 먼저 가버린 세상에서 어떤 강심장을 가진 이가 제 정신을 가지고 살 수 있을 것인가?
남아있는 자식들 때문에 죽지도 못하고 간신히 삶을 이어갔던 어머니에게 삶의 활기는 이미 완전히 꺼져버린 불씨였다. 생의 의욕도 기운도 없으니 몸을 꼿꼿이 세울 수도 없었을 것이고 온전히 무엇인가를 도모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정신을 놓지 못하도록 생을 포기하지 않도록 어머니 나름대로 치열하게 발버둥쳤을 것이라 생각하니 당시 어머니가 너무 안쓰럽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 날의 기억
간혹 정신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밭으로 가서 씨를 뿌렸다. 하지만 척박한 땅에 뿌린 씨앗이 제대로 농작물로 자라기 위해서는 퇴비나 비료를 주고 관리를 해야 했지만 어머니에게 온전히 농사를 짓는 일은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다른 집 밭에 뿌린 콩과 조는 무럭무럭 자라는데 우리집 콩과 조는 바닥에 붙어서 더 자라지를 못했다. 그러는 사이 나와 동생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야말로 매일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큰일이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일이 있다. 아마 아버지 돌아가시고 다음 해니 열두 살이었을 것이다. 동네사람들이 옆 동네에 품삯을 받고 김매러 가는데,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갔다. 주인은 일도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왔다고 구박했고 어머니는 주인 앞에서 쩔쩔맸다. 하지만 다행히 주인이 나를 돌려보내지 않았기에 나는 어머니 옆에 꼭 붙어 앉아서 김매는 흉내라도 내면서 어른들을 쫓아갔다.
그리고 점심이 되자 갈치국에 보리밥이 식사로 나왔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나는 배가 부를 때까지 신나게 먹었다. 주인 입장에서는 몸이 약해서 남들만큼 시원하게 일도 못하는 이가 역시 일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와서 밥 줘야지 어린 아이지만 작게라도 일당 주는 흉내는 내야지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 어린 아이 머릿속에 들어올 리 없다.
밭주인의 구박을 받았지만 입안을 배지근하게 감싸던 갈치국과 속을 든든하게 해주었던 보리밥의 맛, 눈치고 뭐고 아랑곳없이 입이 터지게 밥과 국을 입 안에 밀어 넣었던 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날의 점심은 내 인생에 가장 맛있는 한 끼였다. 그리고 그날 일을 끝내고 일당으로 보리쌀 한 됫박을 받고 부자가 된 기분으로 어머니와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보리쌀 한 됫박으로 며칠의 끼니는 해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한계가 있었고 결국 어머니는 오빠의 월사금과 우리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밭을 팔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놓은 땅에 집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동네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집을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