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픽사베이
처음 자발적 시민모임이라는 단어에 꽂혔을 때, 그런 모임들이 많아져야 우리 사회가 건강해진다는 말에 동의했다. '더디 가도 함께 가자'는 구호에 감동했고, 공동체를 '노아의 방주'라 여겼다.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세상을 꿈꿨고, 무엇보다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는 반드시 더 나은 세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코로나를 맞았다. 많은 공동체 모임이 비대면으로 바뀌었다. 그마저도 살과 숨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던 때와 비교하면 흐지부지하다. 그렇게 모임은커녕 두세 명이 만나기도 힘든 몇 년을 보냈다. 그때보다는 상황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옆 사람의 기침소리에 경계하고, 사람이 많은 식당엔 들어가기를 주저한다.
모임을 할 수 없게 되자, 모임을 열어야 한다는 갈망이 더 커졌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사람의 심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누가 나를 떠미는 것처럼 이끌렸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것 같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이런저런 모임을 한다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지인의 예언(?)대로 '나라가 망하는' 대신 시민사회가 강해지고 있는 걸까?
시민 모임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자. 동아리, 동호회, 스터디도 다 시민 모임이다. 층간소음이 아니면 도통 대화할 일 없는 윗집, 아랫집, 옆집 사이에 홀로 있는 대신, 관심사가 비슷한 이들을 만나 함께 나누고 대화하면 된다. 관심사가 비슷해도 가치관은 다를 수 있다. 우리 모임만 해도 교육관과 양육관, 정치관이 다 제각각이다.
이렇게 낯선 사람들이 서로 만나 생각을 나눌 때만 일어나는 내면의 변화가 있다. 내가 가진 세계와 다른 이의 세계가 부딪힐 때 마주하는 풍경은 떨리지만 생각보다 흥미롭다.
일단 재밌습니다
요새 하도 정치가 비통하여 읽기 시작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도 같은 말을 한다.
"낯선 사람과 함께하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서 하나라는 것, 어떤 차이들은 삶을 풍부하게 하고 골치 아픈 차이들은 타협될 수 있다는 것, 갈등하는 이해관계에 직면해서도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거래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우리는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자기 마음을 큰 목소리로 표출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대화 속에서 우리는 다양성 안에 있는 공공선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리고 혼자서 도달하지 못하는 수준의 음량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기회를 제공하는 장소가 사회 속에 풍부할 때, 우리 국민은 철학적인 관념이 아니라 생동하는 실체가 될 수 있다."
나라에서도 국민이 '생동하는 실체'가 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관공서나 공공기관, 행정복지센터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유명인을 불러 이런저런 강좌를 여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런 일회성 이벤트나 단발성 지원, 정부 주도 사업이 갖는 한계는 지금까지 많이 봐 왔다. 그러니 이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나와 세상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데 더 힘을 실어주길 바란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뭐 이런 거창한 구호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내가 시작한 시민 모임이 나와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작은 한걸음이 될 수도 있다. (설령 대실패(?)를 맛본다 해도 나한테는 이득이다. 하면 무엇이든 배우지 않겠나.) 정치, 환경, 봉사에서 부터 베이킹, 영어회화, 글쓰기까지 주제는 무궁무진하다.
특히 어떤 분야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면 더욱 추천한다. 나의 재능이나 능력에 값을 매겨 판매하는 일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준다고 마음먹는 순간 넘치게 채워지는 신비도 경험할 수 있다. 또 모르지 않는가. 우리 앞에 새로운 길이 열릴지도.
이런 거 저런 거 다 떠나서 시민모임, 무엇이든 해보시라. 무엇보다 재미있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 옮김,
글항아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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