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검열우리에게는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필요하다. 은유 작가는 책 <쓰기의 말들>에서 이렇게 썼다. "슬픔이 노폐물처럼 쌓여 갈 때 인간의 슬픔을 말하는 책은 좋은 자극제다. 슬픔을 '말하는 법'을 배우고 슬픔을 '말해도 괜찮다'는 용기를 준다. 슬픈 책을 읽고 슬픈 일을 꺼내 슬픈 글로 쓰면 슬픈 채로 산다.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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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아프면서 알았다. 쌓인 감정을 혼자서 잘 흘려보내는 기술조차 없었다는 것. 그게 티가 나는지 상사들이 종종 충고했다.
"사람이 좀 풀면서 살아야지. 난 집에 가서 혼자 욕이라도 하는데."
"승원씨도 좀 풀고 살어. 막 하면서."
그 말을 한 상사들이 가장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드는 분들이었다는 건 아이러니지만, 맞는 말이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욕할 생각도 못해 봤고 한바탕 울지도 못했다. 기분은 나쁜데 상대의 입장이 금세 이해가 돼 버리니 맘먹고 미워하거나 탓을 하지도 못한다. 썩 착하지도 않으면서 답답한 노릇이다.
그러다 보니 직장생활을 할 때는 자려고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가슴을 치는 밤이 많았고, 낮에는 열이 가슴 위쪽으로 뜨는 상기증 때문에 더 멍해지곤 했다. 그런 화병이 그대로 굳어 지금은 화석이 된 것 같다.
요즘 들어선 혼자서 하는 쌍욕이 얼마나 정신건강에 좋은지 느끼고 적극 활용 중이다. 잘 울고 그만큼 잘 털어버리는 애인을 보며, 울고 싶을 땐 마음 놓고 '정화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하다못해 지나가는 오토바이 굉음에 맞춰 소리라도 꽥 지른다.
표현. 지금 나의 화두는 진정 그것이다. 말이나 글로 제대로 표현하는 데는 번번이 실패하지만, 어떻게든 언어를 빚어서 몸 밖으로 밀어내려 한다. 내 존재를 뚜렷한 선으로 그려나가는 기분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
한 청년단체의 행사로 심리극에 참여했을 때, 내가 맡은 역할은 '웅크린 마음'이었다. 바닥에 웅크린 나를 다른 참여자들이 이리저리 밀며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점점 크게 외쳤다. "웅크리지 않아!"
주인공 참여자를 돕기 위해 맡은 역할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언제나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 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외치고 싶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반복했다. "웅크리지 않아!" 장풍으로 돌을 하나하나 쪼개는 기분으로 외쳤고, 외칠수록 슈퍼파워가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정말이지 그런 후련함은 처음이었다. 그날 이후 적어도 그때 떠올린 순간들에 대해서는 훨씬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됐다.
내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도 비슷한 과정이었다. 인생에서 단역으로도 두기 싫던 치부와 흑역사에게 글에서는 주연, 조연을 맡겼다. 그것들이 만들어온 삶을 펼쳐놓고 들여다보면서 지금의 걸음걸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글은 취약한 다리 근육을 지탱해 원하는 곳으로 나아가게 하는 지팡이였다.
김영하 작가가 말했다. 모든 삶은 이야기와 같고, 이왕 머릿속에 이야기로 남는 삶이라면 지금까지의 삶을 자신에게 좋은 방향으로 편집할 수도 있다고.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과거에 머문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내면의 어둠을 소외시키지 않고 거듭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어둠을 자신의 일부로 통합한다.
뜨거운 돌처럼 어떻게 다룰지 모르던 감정들을 문장문장으로 식혀내며 들여다보니, 내 이야기는 비극이 아니었다. 열기를 식힐 기회가 없었고, 열기 때문에 과거는 실제보다 치명적으로 보였다. 식은 돌을 자꾸 주무르자 찐빵처럼 말랑해졌다. 반으로 갈라 그 안에 숨은 앙금 같은 걸 맛볼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