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 사능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하는 내내 김상기씨는 주변의 시선을 신경 썼다.
변상철
김상기씨는 1971년 납북되었다가 1972년 귀환한 승운호의 선원이었다. 납북 당시 나이가 17살이었던 그는 현재 전기설비시공업을 하고 있다. 인터뷰 당시 그는 팬데믹 상황으로 밀렸던 전기 작업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20대에 고향 강원도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그는, 20년간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10년 전 경기도 남양주시 사능으로 이사했다.
사능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50년 만에 외부인에게 납북귀환 사실을 털어놓는다며 굉장히 긴장하는 눈치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다른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랜 사회생활 동안 정보기관의 감시로 인해 주눅 든 모습이 보였다.
카페 1층 옆 테이블에 사람들이 앉아있는 것을 신경 쓴 탓에 사람이 적은 다른 층으로 옮겨가며 인터뷰 할 정도로 그는 주위 시선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부당한 일을 당해도 아무 소리 못 하고 살았던 그가 자신의 피해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승운호 선원들의 권유였다고 했다.
납북되었다가 1972년 9월 7일 속초항으로 돌아온 배는 모두 7척(160명)이었다. 이 중 한 척이었던 '승운호'의 경우, 선원 23명이 전원 돌아왔다. 50년이 지난 후 23명 중 21명의 피해자(또는 유족)가 진실규명과 재심을 시도하고 있다. 이들의 재심 시도에는 같은 피해를 경험했던 동료 선원들의 용기와 응원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피해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은 또 하나의 원동력은 아내의 응원이었다. 김상기씨의 피해사실을 이해하고 남편이 국가기관으로부터 겪었던 피해를 함께 싸우며 이겨냈던 아내가 지금까지 버텨낸 힘이었다고 한다. 김상기씨는 묵묵히 견뎌내며 함께 싸워준 아내가 그저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북한에서) 13개월을 보내던 중 이후락이 7.4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우리도 한국으로 내려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겼던 것 같아요. 그때는 그 일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그런데 한국으로 딱 넘어오니까 그게 아니었어요. 속초항에 도착하니까 우리를 남 대하듯 하는 거야. 우리 가족들이나 우리를 반가워하지,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에서는 죄인 취급을 해도 그런 죄인 취급이 없어요.
내가 현행범으로 잡혀간 것도 아니고... 납북되었던 사람 중에는 나보다 어린애들도 많았는데. 그 어린애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을 끌고 가서 죄인 취급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억울하게 50년 동안 말도 못 하고 살았어요. 50년 동안 감춰왔던 것이지만 너무 생생해요."
"북한 배에 붉은 글씨의 플래카드"
김상기씨가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으로 지금은 '덕구온천'으로 유명해 진 곳이다. 그곳에서 서너 살 되던 때에 고성 아야진으로 올라왔다. 다른 동료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김상기씨 역시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학업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아야진에 있는 천진초등학교를 졸업했어요. 그때는 돈이 없어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할 때예요. 가난한 아이들은 사납금을 받지 않는 비인가 학교인 '숭실중학교'나 '경동중학교' 같은 곳을 다녔는데, 저 역시 경동중학교를 다녔어요. 그 학교는 사납금이 없는 대신 졸업장도 없어요. 아무리 비인가 중학교라도 학교를 다니려면 역시 돈이 들잖아요. 그러니 학교를 다니면서도 오징어 배를 타야 했죠. 당시에는 우리 친구들이 거의 전부 다 그렇게 공부를 했어요. 나도 처음 오징어 배 탈 때 나이가 15살이었으니까요."
당시 뱃일하는 친구 중에는 13살부터 뱃일을 시작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뱃일에는 나이제한도 경력제한도 없었다. 서류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가장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보통 나이 어린아이들은 혼자 다니지 않고 아버지나 형하고 같이 다녀요. 같이 승운호 타고 납북되었던 2년 후배 김성대는 나보다 더 어렸어요. 그런 애들이 뭘 알아요."
나이 어린 선원들은 정식 선원이 아니라, 뱃사람들 말로 '가고쟁이'(임시로 고용된 선원)였다. 학교에 다니는 어린 학생들은 주로 주말이나 방학을 이용해 배를 타야 했다. 그래서 학기 중에는 연안에서 당일치기 뱃일을 하고, 방학 때는 먼 바다로 나가는 배를 타곤 했다.
"계절마다 다 잡히는 고기가 다르잖아요. 여름 가을에는 오징어, 겨울에는 명태, 다 달라요. 그중 주로 타러 다니는 배는 오징어 배였어요. 6월부터 10월까지는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주로 오징어 배를 타는 거죠. 생선을 잡으면 5대5, 4대6 이런 식으로 선주와 이익을 나눌 때니까요. 나도 가고쟁이로 다녔어요."
1971년 그해도 여름 방학을 이용해 친구들과 같이 승운호를 타고 오징어를 잡으러 나갔다. 조업을 끝내고 돌아오던 길에 북한의 쾌속정(일명 '까질이')에 붙잡혔다.
"우리가 조업을 끝내고 돌아가자고 해서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뭐 저쪽에서 고속경비정 같은 것이 물살을 가르면서 다가와요. 워낙 배가 빠르니까 금세 우리 배를 따라오더라고요. 우리는 북한 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한국 해경 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를 안내하려고 왔나보다 했죠. 배가 가까이 오는데 이상하더라고. 한 백 미터 정도 앞에서 서더니 공포탄을 막 난사해서 깜짝 놀랐죠. 더군다나 북한 배에 붉은 글씨의 플래카드가 보이는데 '위대한' 어쩌구저쩌구하는 문구가 쓰여 있는 거예요. 그걸 보고 대번에 질려버린 거지. 그때부터 공포가 엄습해 오더라고."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