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연등이 걸려있다. 연등도 예쁘지만 바닥에 비친 연등 그림자가 더 예쁘다.
오창환
처음에 법정 스님은 김영한 여사의 청을 사양했다. 그러나 김영한 여사는 근 10년을 법정 스님에게 무주상보시를 간청했다. 1996년 법정 스님은 비로소 그녀의 청을 받아들인다. 대원각을 시주받아 청정도량으로 변모시켜, '맑고 향기롭게' 운동의 근본도량으로 삼기로 했다. 그렇게 요정 '대원각'은 청정도량 '길상사'로 탈바꿈했다.
1997년 12월 봉행된 길상사 개원법회에서 법정 스님은 김영한 여사에게 염주 한 벌과 함께 '길상화'라는 법명을 지어주었다. 그로부터 불과 2년 후인 1999년 11월 그녀는 육신의 옷을 벗었다. 김영한도 진향도 자야도 김숙도 다 내려놓고 가셨다. 그녀의 유언대로 눈이 많이 오는 날 그녀의 유골이 길상사 경내에 뿌려졌다.
1999년 여름 법정 스님이 전국의 성당에 성모상을 세워온 최종태 서울대 교수를 찾아왔다. 그는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30대 후반 어떤 작품을 해나갈 것인가 고민할 때 반가사유상이 내게 왔다. 반가사유상이 상징하는 정신적 아름다움을 보고 '아, 이거다!' 싶었다. 언젠가는 관음보살상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누가 이 얘기를 법정 스님에게 한 모양이다. 그가 '잘됐다' 하며 즉시 우리 집으로 왔다." (<조선일보> 2021.12.25. '아흔번째 성탄 맞아도 인생이 뭔지 모르겠다...그저, 하늘에 조각 한 점' 인용)
전 세계에서 가톨릭 교회만큼 건물을 짓는 노하우를 가진 집단이 또 있을까. 카타콤부터 시작한 교회 건축은 전 세계 없는 곳이 없고 그 역사도 길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성당 건축을 보면 항상 느끼는 것인데, 기능적이면서 단정하고 검소하다. 어떻게 보면 세상 모든 건물의 표본이다.
1980년대부터 최종태 조각가가 성모상을 만들면서 아름다운 건물에 아름다운 성모상이 더해졌다. 단순하고 소박한데다 한국적 미를 잘 녹여낸 최 작가의 작품으로 한국의 교회 건축이 한단계 올라간 것 같다. 그런 분이 관세음보살상을 만든 것이다.
성모님 아닌 불상을 한참 보고 떠났다
부처님 오신 날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불상을 생각하며 길상사로 향했다.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서 성북 02 마을버스를 탔다. 길상사는 부처님 오신 날 준비로 한참 분주하다. 연등은 물론 미리 달아놨지만, 작업자들이 연꽃을 심고 있고 사다리를 놓고 전기선을 손보고 있다.
관세음보살상을 여러 각도에서 보았다. 참 아름답다. 이 불상에서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보인다. 관세음보살상 앞에 마당 한가운데 의자를 펴고 스케치를 했다. 한 무리의 여성들이 먼저 와 있던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모두 천주교 신자로 같은 성당에 다니고 있었다.
"아이고 자매님, 여기 웬일이세요?"
"네, 여기 성모님이 있다고 해서 왔어요."
"여기 성모님은 안 계시는데..."
내가 끼어들었다.
"이 조각상 보러오셨구나. 이 불상이 성모님 많이 조각하시는 최종태 조각가님 작품이에요."
"아, 그렇구나... 하긴 모든 종교는 끝까지 가면 다 만난다고 하더라고요."
이들은 거기서 성모님 아닌 불상을 한참 보고 떠났다. 끝까지 가면 성모상이든 불상이든 무슨 상관이랴.
스케치를 마치고 절 경내를 다시 돌아봤다. 이 절은 일반 건물을 개조했기 때문에 보통 절과는 배치가 다르다. 관세음보살상이 우리를 맞아주는 것도 그렇고, 보통 절집은 본채 앞에 탑을 두는데 비해 이 절은 탑을 본채와 멀리 떨어진 설법전 오른편에 따로 터를 만들어 두고 있다. 탑 놓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나 보다. 그래도 모든 건물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길상사가 생긴지 얼마 안 되어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수행자들이 얼마나 수행을 해야 그동안 이 터에 쌓인 업이 씻겨나갈까 생각했다. 이번에 와보니 그런 것은 흔적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