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성보이지 않는 소외 속에서 나 역시 생각하게 됐다. 내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답을 내린 많은 생각들은 내가 만나온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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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건 일종의 권력이다. 소수일수록 자기를 변호할 상황은 많지만, 적당한 언어를 찾는 일은 더 어렵다. 소수자의 말들은 흔히 신뢰받지 못하거나 곡해된다. 접해 보지 않은 정보는 의심받기 쉽고, 다수의 해석은 다수의 기준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 차를 인식하는 건 다수자가 아닌 소수자가 된다.
두 사람 사이의 '다름'이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일 때, 소수의 특성을 가진 사람은 다수의 언어를 이용해 자신을 숨긴다. 모든 말과 행동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역산해 '선택'한다. 이 관계에서는 어디까지 진실할지, 서사를 잘라낼지 수정할지, 꾸며낸다면 어떤 얘기가 적절하고 뒤탈 없으며 관계의 진정성을 해치지 않을지 고민한다.
공감의 골짜기를 혼자서 뛰어넘는 과제도 부여된다. 소수의 입장인 사람이 상대방의 세계에 감정 이입하여 원활히 소통하려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에너지원이 돼야 할 자기감정이 누군가에게 돌봄 받지 못하면 지쳐간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오히려 고립에 가까워진다. 누군가는 골짜기로 추락해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소수자를 사회적으로 취약하게 하는 언어, 신뢰, 공감의 부족은 '당연히 너도 그렇겠지'라는 전제에서 시작되고, 이런 무의식은 사회적 무관심과 몰이해에서 출발한다. 강요 없는 강요로 커버링(covering, 사회적 낙인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 쓰는 과정)이 이루어진다.
'훌륭한 소수자'가 되긴 싫은데
이 취약성을 넘어서는 건 꽤 까다로운 기술이다.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을 짚어내는 일. 자기 삶에 지친 이들을 눈살 찌푸리게 하지 않고 이해의 언저리까지 끌어당기는 일. 때로는 사회적 기여감을 주며 관심을 끄는 일. 상대의 고통이 소외되지 않게 하여 반감을 줄이는 일. 상처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일.
냉정히 말해 소수자성을 드러내면서 호감을 유지하자면 자기연민과 피해의식, 분노와 억울함, 우울, 좌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을 필요가 있다. 인생을 얘기하면서도 켜켜이 쌓인 감정의 무게를 조절하는 내공이 요구된다. 소수자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매력자본'이다.
한동안 그게 분했다. 좁은 방에 나를 가둔 사람에게서 "왜 그러고 있어? 거기 갇히면 안 되지"란 말을 듣는 기분이었다. 세상과 인생이 내 맘에 적재한 쓰레기를 알아서 처리하고 마음의 평수까지 넓혀야 한다니. 너무하잖아?
하지만 나로선 그걸 넘어서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나를 드러내지 않고 나로서 사랑받을 수는 없으니까. 여러 사람에게 지극히 사랑받더라도 자기자신으로 사랑받은 적이 없다면, 그 사랑은 실체로 다가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를 가둔 이의 뜻에 동조해 그대로 살다 보면 숨이 막힌다. "나 언제까지 숨어 있어?"라고 물어오는 자아에게 "네 모습은 그대로 멋져"라고 말해봐야 자아는 안 믿어준다. 자기를 부정해온 사람이 세상과 삶을 긍정하기도 쉽지 않다.
결국 난 그 감정 쓰레기들을 스스로 치워보기로 했다. 나 혼자 만든 쓰레기는 아니지만, 이 공간에서 살아가야 하는 건 나라서. 넓어진 공간에 더 좋은 것들을 들여오고 싶고, 시야가 좁아져 누군가를 배제하는 일이 없길 바라서다.
약한 사람이 악해지기는 쉽다. 사는 게 힘겨워 남을 볼 여유를 잃을 때, 언더도그마(underdogma, 약자는 무조건 선하고 강자는 무조건 악하다고 인식하는 현상)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겪은 사회적 폭력을 재생산한다. 하지만 자기 경험이 역지사지의 동력이 되면, 무관심과 몰이해를 넘어서는 힘이 될 수도 있다.
나르시시즘의 긍정적인 효과
<위대한 쇼맨>이란 뮤지컬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19세기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사업가 '바넘'은 샴 쌍둥이, 다모증·왜소증·거인증 환자, 고도비만인 등 당시로선 '괴물(freak)'로 취급받던 이들을 모아 자신만의 쇼를 만드는데, 이 쇼가 선풍적 인기를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