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1월 6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주최로 열린 인권회복기도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원주에서 출범한 정의구현사제단은 9월 26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한국순교복자축일 미사'에 이어 저녁 8시 반경 어두워지는 명동거리로 나왔다. 제의를 입은 사제들이 십자가를 들고 앞장서고 그 뒤에 수녀들, 신자들이 시위에 나서자 어리둥절한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고, 설마 거리 시위까지를 예상하지 못했던 경찰은 당황해하면서 차단에 나섰다.
사제단은 "유신헌법 철폐하라! 구속자 석방하라! 언론자유 보장하라! 중앙정보부 철폐하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저희도 긴장하고 두렵고 떨린 채 나섰다가 시민들의 박수 소리를 들으니까 힘이 생기는 거예요. '이게 민중의 소리구나' '하느님이 돕고 계시는구나' 하는 느낌이 진하게 왔어요." (주석 7)
천주교가 그동안 보수성이어서 박정희 정부와는 큰 마찰이 없었다가 사제들이 거리 시위에 나서고 금기시되어 온 '중앙정보부 철폐' 구호까지 나오게 되면서 긴장하고, 중정은 '배후'를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구호는 함세웅이 현장에서 쪽지에 적어서 매가폰을 든 오태순 신부에게 전하고, 오 신부가 우렁차게 구호를 외치고 모두 따라 하였다.
함세웅이 정의구현사제단의 조직에 앞장서고 있다는 첩보가 중앙정보부에 알려지고, 그는 8월 하순 중정과 첫 '악연'을 맺는다.
우리가 움직이는 것을 알고, 저를 만나자고 중앙정보부 2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걱정이 되어서 정보부에 먼저 끌려가셨던 선배 신부님들을 찾아갔어요. 갔더니 '이상하다, 낮에 데려가진 않는데, 밤에 데리고 가는데 이상하다' 그러면서 '어쨌든 잘 갔다 오는데, 그래도 모르니까 내복을 입고 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8월에 내복을 꺼내 입었어요. 8월 하순인가? 정보부 차가 와서 남산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이게 남산으로 끌려가는데, 올라가다가 외교구락부로 가더라고요. 식당이예요. 그때 조일제 차장과 2국장 등 몇 사람이 왔는데, 알고 보니까 점심을 먹으면서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하는 그런 자리였어요. (주석 8)
그가 중정에 첫 연행된 것은 1974년 8월 29일, 이날은 일종의 예비 검속으로 대접하면서 겁만 주는 정도였다. 신부라는 신분의 덕을 본 셈이다.
중앙정보부가 우리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중앙정보부에 종교과가 있는 게 이례적인데 바로 우리 때문에 만든 겁니다. 그때부터 천주교 신부님 파악하고, 목사님들도 파악하고, 여러 차례 정보부에 끌려다녔는데 처음에는 저도 많이 두려웠어요. '정말 죽었구나'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갔는데, 그분들이 "여보쇼, 여기 사람들 뿔 있소?" 그러는 거예요. 자기들이 먼저 그래요. 조금 지내고 마음을 놓으면서 자신감을 가졌죠. 대화하면서 똑바로 쳐다봤더니, 똑바로 쳐다본다고 뭐라 그래요. (주석 9)
주석
6> 앞의 책, 76쪽.
7> 앞의 책, 78쪽.
8> <신부가 그런 일 안 하려면 뭐하러 사제가 돼?>, <함세웅신부인터뷰증언기록>, 53쪽, 기쁨과희망 사목원, 2021.
9> <함세웅신부의 시대증언>,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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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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