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성당 진무영성지에 있는 노동사목 비석강화성당 진무영성지 한편에는 강화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한 노동사목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이 세워져있다.
운민
만만치 않은 강화의 내공은 초등학교 맞은편에 있는 천주교 성당에서 계속된다. 강화와 천주교의 인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데, 철종의 할머니인 송 마리아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강화에서 순교했다.
강화성당은 조선시대 강화부의 진무영(경기연안을 수비하기 위해 강화읍내에 두었던 진영)으로 탄압과 박해가 있을 때마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지금 이곳은 성당과 함께 진무영 천주교 성지가 들어서 있어서 근처를 지나는 순례객들과 여행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하지만 나의 관심을 끄는 곳은 순교성지 구석에 자리한 '가톨릭 노동사목의 시작'을 알리는 비석이었다.
강화와 노동자라고 하니 현재의 강화와 잘 연관이 되지 않는 단어이긴 하지만 사실 이 고장은 1930년대에서 70년대까지 100% 목화솜으로 만든 천연 면직물인 소창(기저귀)으로 유명해 직물산업이 번성했다고 한다. 80년대까지 강화의 소창 공장은 약 80군데에 이르면서 전국 각지에서 강화로 이주한 노동자의 숫자는 점점 증가했다.
1967년 가장 큰 규모의 1200명의 노동자가 근무하던 삼도 직물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900명이 가입하면서 사측에서는 노동조합에 적극 가담했던 노동자를 해고하고, 와해시키려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당시 노동자들의 회합 장소를 제공하는 등, 노조활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던 강화성당의 전 미카엘 강화 본당 주임신부에게도 여러 위협이 가해지면서 가톨릭 주교단을 비롯해 정치권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기에 이른다.
결국 여기 강화성당에서 주교단이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공동 성명서'를 발표한다. 곧이어 정부에서 대책을 발표했고 해고되었던 노동자 전원이 복직하면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강화는 고려, 조선의 역사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매 순간마다 역사의 층을 계속 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