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직물의 굴뚝구한말 부터 60년대에 이르기까지 강화는 대구와 함께 직물산업의 중심지로 유명했다. 굴뚝만 남아있는 삼도직물터는 번성했던 강화를 대변해 주는 듯하다.
운민
우선 용흥궁 공원 앞에 웬 굴뚝 하나가 외롭게 서 있기도 했고, 그 자태가 평범한 굴뚝의 생김새가 아니라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해 먼저 찾아가 보기로 한다. 굴뚝 한편엔 비각도 함께 있었고, 재봉 뜰 모형이 같이 보존되어 있어, 어렴풋이 옷을 만드는 공장터인가 짐작했다.
설명문을 차근차근 읽어보고,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가 바로 강화의 직물산업을 주도한 삼도 직물의 터임을 알게 되었다. 삼도 직물은 1947년 창업한 국내 굴지의 직물회사였다. 1970년대에는 역직기 210대가 있고 1200명의 직원이 종사할 정도였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대기업이나 다름없는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화의 직물산업은 대구와 함께 한국경제를 이끌어가는 큰 존재였고, 강화읍 여기저기에 직물공장이 들어섰다. 하지만 본격적인 경제개발 이후 한국은 노동집약적 경공업 대신 거대한 규모의 중화학공업 위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중국 등 후발주자로 인한 인건비의 타산성이 맞지 않으면서 강화에 있는 모든 직물공장 등은 여기 삼도 직물처럼 굴뚝만 남았거나, 아니면 카페와 박물관 등으로 바뀌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굴뚝도 당시엔 30m가 넘을 정도로 아주 큰 규모를 자랑했지만 지금은 윗부분만 남아 관심을 가지고 살피지 않으면 이 장소가 유서 깊은 장소일 것이라 짐작하기 힘들다.
바로 뒤편에 있는 한 비각도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 김상용을 기리기 위해 만든 순절비로서 병자호란 당시 강화성이 함락되자 순절한 충신으로 유명하지만, 우리에게는 구운몽을 지은 그 유명한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로 더 알려져 있다.
당시 김상용의 아내도 같이 순절하려 했지만 뱃속에 김만중을 임신하고 있었기에 차마 죽지 못하고, 무사히 순산했다고 알려진다. 하마터면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등의 걸작들이 세상의 빛을 못 볼 뻔했다.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성공회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