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16일 일본 지진 발생과 관련해 기자들에게 발언하고 있다.
교도통신=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일본 정부가 시도하는 것이 있다. 1990년대 초반에 했던 것과 똑같은 것이다. 일본은 러시아제 천연가스의 공급 감소로 곤란을 겪게 될 서유럽을 위해 천연가스를 제공할 의사를 밝히고,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자위대도 우크라이나 지원에 참여시키고 있다. 지난 8일에는 자위대 공중급유수송기가 도쿄와 그 남쪽 오사카의 사이에 있는 아이치현 고마키 기지를 이륙했다. 방탄복과 헬멧 등을 제공할 목적에서다. 자위대가 방탄복을 해외에 지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런 가운데 '실속'도 챙기고 있다. 전쟁에 편승해 군사대국화를 향한 움직임이 감지된다.
상임이사국 진출 위해 시동 걸기
전쟁 발발 사흘 뒤인 2월 27일부터 아베 신조 전 총리는 공개 석상에서 핵공유를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비핵 3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정부 내 핵 공유 논의는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지난 13일 제89회 당대회에서 헌법에 자위대를 명기하자고 역설했다. 기시다 총리는 "자민당이 제시하는 4개 항목의 개정안은 모두 지금이야말로 힘써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이런 흐름들과 동반되는 것 중 하나가 1990년대 초반을 연상케 한다.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해 시동을 거는 일이 바로 그것.
기시다 총리는 당대회 때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의 폭거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틀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우리나라는 여러 해 동안 유엔 개혁 그리고 안보리 개혁을 호소해 왔으나, 기시다 정권 아래에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겠다"고 공언했다.
일본은 상임이사국 진출을 추진하는 인도·브라질·독일과 함께 G4를 형성해 '상임이사국과 비상임이사국을 확대해 안보리를 재편하자'고 주장해왔다. 이것이 일본이 말하는 안보리 개혁이다. 기시다 총리가 임기 내에 실현시키겠다고 언급한 안보리 개혁은 자국을 상임이사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틀 뒤인 15일,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대신이 좀더 직접적인 언급을 내놨다. 그는 러시아의 철군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안보리에서 채택되지 못한 것과 관련해 "일본을 상임이사국으로 넣는 것을 포함하는 개혁의 실현을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정례기자회견에서 다짐했다. 러시아의 침공을 명분 삼아 상임이사국 진출을 관철시키려는 일본 정부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현상들이다.
미국의 영향력과 궤를 함께한 시도
일본이 상임이사국 진출을 처음 시도한 것은 구소련이 해체되고 미국이 일시적으로 강해지면서 세계질서가 탈냉전으로 휩쓸려 들어간 1990년대 초반이다. 이때 상임이사국 진출을 추진한 인물은 구소련 해체 당시의 총리인 미야자와 기이치(재임 1991~1993)다.
미야자와 총리의 후임자는 1993년 8월 9일 취임한 호소카와 모리히로다. 호소카와 총리는 일본신당 소속이었다. 1955년 이래의 자민당 장기집권이 미야자와 총리 시절에 깨졌던 것이다. 1993년 7월 18일 중의원선거에서 자민당이 역대 최저 득표율인 36.6%를 기록함으로써 생겨난 결과였다.
소련은 물론이고 자민당도 약해지던 시절에 총리가 된 미야자와는 1992년 7월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 대통령과의 미일정상회담에서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를 언급했다. 뒤이어 6월에는 유엔평화유지활동(PKO) 협력법을 제정하고, 유엔 환경개발회의에서 세계 경제 및 지구환경에 대한 공헌을 약속했다. 1996년까지 개도국 환경 공적개발원조(ODA)를 위해 1조 엔을 공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지금처럼 '선행'을 베풀면서 상임이사국 진출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해 함께 내놓은 카드 중 하나가 고노 담화다. 위안부 강제동원에 군대가 개입했으며 그것이 강제성이 있었음을 시인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담화는 일본신당 소속 총리가 취임하기 5일 전인 1993년 8월 4일 발표됐다. 윤리적 흠결을 안고는 상임이사국이 되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였다.
상임이사국인 소련이 사라지고 일본의 '최'우방인 미국이 일시적으로 강해지던 때였다. 그래서 1992년부터 상임이사국 진출을 시도한 것은 일본 측이 볼 때는 시의적절했다.
하지만 1993년에 7.18 충격을 겪은 일본 정계는 그 뒤 혼란에 빠져 일본신당·신생당·일본사회당 총리가 연이어 집권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 혼란은 1996년에 자민당 출신인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가 취임하면서 다소 약해졌다. 상임이사국 진출을 시도한 다음해부터 자민당 정권과 일본 정치가 위기를 겪은 것은 일본의 안보리 진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올해는 미야자와 총리가 상임이사국 진출을 표방한 지 정확히 30년이 된다. 러시아의 국력은 그때보다 강하지만,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는 그때보다 열악하다. 한동안 침체됐던 미국의 지위는 전쟁 발발을 계기로 그때처럼 강하다. 일본 자민당은 그때보다 탄탄한 상황에 놓여 있다. 아베 신조를 비롯한 극우세력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기반을 갖고 있다. 미국이 일본에 의지하는 수준도 그때보다 훨씬 높다.
여러 가지 마찰 가능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