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린 신라의 왕들.
이건욱 삽화
예술과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서는 탄탄한 정치·경제적 토대가 우선돼야 한다는 것은 이미 역사를 통해 증명된 바 있다.
나라의 곳간이 텅텅 비어있고, 외세의 침략이 빈번한 상황에서 대규모의 화원을 조성하고, 신하들을 위로하며 격려할 공간을 만들고, 왕자의 교육과 왕위 계승에 도움을 줄 궁전을 축조하는 왕은 없거나 드물 듯하다.
경주의 대표적 유적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동궁과 월지도 이런 전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고대왕국 신라가 만든 동궁과 월지의 발굴조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 동궁과 월지 조사·연구 마스터플랜 수립 연구'에서 동궁과 월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적 제18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궁원지로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제30대 문무왕 14년(674) 2월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그곳에 온갖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953년 신라가 고구려에 귀부(歸附)할 때까지 262년간 왕이 군신(群臣)을 위해 항연을 베풀었던 장소이자 태자(太子)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설명처럼 동궁과 월지는 7세기 중반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신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분명 국력과 나라의 기세가 약했을 때는 아닐 것이다.
태종무열왕에서부터 시작된 신라의 전성기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책 <신라사 총론>은 위의 질문에 아래와 같이 답하고 있다.
"신라 중대(654~780)는 제29대 태종무열왕대부터 제36대 혜공왕대까지로, 태종무열왕과 그 직계 후손이 재위한 시기였다. 중대 초기 신라는 당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이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보이자 신라는 이를 무력으로 물리치고 드디어 삼국통일을 달성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이전보다 영토와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발달된 선진 문물을 수용함으로써 이후 100여 년에 걸쳐 유례없는 번영을 이룩하였다."
앞서의 언급처럼 '신라 중대'가 '유례없는 번영을 이룩한' 시기라면 태종무열왕과 그의 아들 문무왕, 손자 신문왕이 통치했던 7세기 중후반은 신라 번영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는 동궁과 월지가 만들어진 때와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나라의 힘을 키워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고, 불교문화와 예술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까지 만들어 통일신라의 골격을 형성시킨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굴복시킨 태종무열왕은 654년부터 661년까지 신라를 통치했다. 그의 이름 김춘추는 굳이 역사서만이 아니라 신라를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도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다.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였던 태종무열왕에 관해서는 흥미로운 기록들이 많은데, '두산백과'가 소개하는 것들을 인용하면 이렇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열왕은 풍채가 영준하고 거동이 위엄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리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그가 하루에 쌀 서 말과 꿩 아홉 마리를 먹었으며,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는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었는데도 하루에 쌀 여섯 말과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를 먹었다고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무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642년에 딸인 고타소가 백제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직접 고구려로 가서 원병을 요청해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