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2차 시국선언문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2차 시국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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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주교의 양심선언과 당국의 연행은 천주교에 활화산이 되어 타올랐다. 당장 같은 날 전주교구에서 지 주교와 사회정의구현을 위한 특별미사, 7월 25일 김수환 추기경과 주교단 공동주최로 명동성당의 기도회, 27일 인천교구, 30일 원주교구, 8월 2일 대구교구 등에서 각종 기도회가 열렸다.
명동성당과 각 교구의 기도회와 미사는 8월에 이어 9월까지 계속되고 독일에서도 재독 한인들의 주최로 열리고, 9월 22일에는 신ㆍ구교가 연합하여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가톨릭문화관에서 개최되었다.
마침내 9월 24일 정의구현사제단의 출범기도회가 원주교구 원동성당에서 열렸다. 전국에서 모인 300여 명의 사제들은 인권회복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계속하기로 결정하고 정식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하였다. 사제들 외에 수도자ㆍ신자 등 1천 5백여 명이 참석한 이날 기도회는 지 주교의 석방 등을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섰다.
사제단 출정식이 원주에서 열린 것은 지 주교의 근무지인데다 1971년 10월 이곳에서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는 반부패 시위가 전개된 이래 민주화의 각별한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조선의열단ㆍ흑색공포단ㆍ다물단ㆍ철혈단ㆍ한인애국단 등 우리 독립운동단체들처럼 지하비밀조직이 아닌 공개된 천주교 사제들의 정의구현을 목표로 하는 '느슨한' 조직이었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조직은 한 마디로 잘라 말하기가 어려운 면을 내포하고 있다. 단체이기 때문에 분명히 조직이 성립되기 마련이지만 꼭 그렇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또한 그 어느 단체보다도 조직적이다. 조직적이면서도 비조직적이고 비조직적이면서도 조직적인 기구가 바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비조직적이면서 조직적'인 특성으로 인해 반세기에 이르도록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한국천주교 사제는 1,200여 명(외국인 2백여 명 포함)이고 사목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신부는 9백여 명이었다. 그 중 3백여 명이 참여한 것이다.
주석
1> 김삼웅 편, <민족민주민중선언>, 180쪽, 일월서각, 1984.
2> 윤일웅,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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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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