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혁명에 참여한 어린 소년을 붙잡는 일본 헌병경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19년 7월 26일 서대문감옥에서 예심계 조선총독부 판사 일본인 영도웅장(永島雄藏)에 의해 행해진 신문(訊問)에서 박동완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문 : 3월 1일 선언서를 발표하면 폭동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는가.
답 : 폭동이 일어날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수많은 군중이 모이면 자연 소요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었다.
문 : 피고 등이 독립선언을 했기 때문에 황해도ㆍ평안도ㆍ함경도ㆍ경기도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예상하고 한 것이 아닌가.
답 : 그런 예상은 하지 않았었다.
문 : 각 지방으로 선언서를 보내어 발표하게 한 것은 알고 있었으므로 자연 폭동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답 : 서울에서는 선언서를 낭독 발표한다는 것이었으므로 소요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으나, 각 지방에서는 다만 선언서를 보낸다는 것뿐이어서 폭동이 일어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주석 5)
주석
4> 이병헌, 앞의 책, 467쪽.
5>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 독립운동자료집(12) 3ㆍ1운동1>, 186~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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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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