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정동제일교회주변에 초가와 기와집이 있고, 좁은 골목길 사이로 초창기 정동제일교회 모습이 우뚝하다. 라틴십자가형 평면이 드러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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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완이 열심히 공부하면서 성장하고 있을즈음 나라의 사정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주요 사건을 살펴보자.
1896년 : 아관파천,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설립.
1897년 : 대한제국으로 국호변경.
1898년 : 흥선대원군 사망, 보부상들 황국협회 설립, 만민공동회 개최, 독립협회 열강의 이권침탈 철회 주장.
1899년 : 영학당 활동.
1890년 : 활빈당 활동.
1901년 : 제주에서 이재수의 난 발발.
1902년 : 서울 -인천 간 전화개통.
1902년 : 제1차 하와이 이민.
1903년 : 용암포사건 발생, 목포 부두 노동자 동맹파업.
1904년 : 한일의정서 체결, 송병준ㆍ이용구 등 일진회 조직.
1905년 : 을사늑약 체결, 시종무관장 민영환 을사늑약 반대하며 자결.
1906년 : 서울에 조선통감부 설치, 의병장 최익현 등 일제에 피체.
1907년 : 국채보상운동, 나철 등 을사오적 습격, 고종 폐위되고 순종 즉위, 한일신협약 체결, 정미의병 활동, 신민회 설립, 13도 창의군 결성 등이다.
박동완은 1907년 22세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근대교육을 받으면서 민족의식과 기독교 정신을 수용하였다.
배재의 전도대상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 당사자들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까지도 확장되어 있다. 또한 세례식을 일종의 전도의 장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을 정규과목으로 편성함으로써 배재학당 학생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기독교 교리와 원리를 배우게 된다. 배재의 교사나 학생들은 믿지 않는 학생들이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하여 특별히 노력하였다. 따라서 배재에 입학한 박동완도 이러한 환경에 쉽게 노출되어 자연스럽게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최병헌 목사의 세례 준비반에서 교육을 받고 회심했을 가능성이 있다. (주석 1)
박동완은 23세이던 1908년 장로목사 존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박동완은 1908년 존스(G. H. Johns, 조원시(趙元時), 1867~1919)로부터 세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