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하는 현의 배음들악기마다 음색이 차이 나는 이유는 ‘배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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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피아노 건반을 누르거나 활로 바이올린을 켤 때 우리가 듣는 음은 '기본음'에 2배음, 3배음, 4배음, 5배음 등이 중첩되어 동시에 들리는 것이다. 대체로 우리가 음높이라고 인식하는 성분은 '기본음'이지만, 하나의 현이 진동하더라도 그 안에는 저렇게 다양한 진동의 양상이 중첩되어 일어난다. 그런데 악기마다 2배음, 3배음, 4배음 등의 배음 비중이 제각각이다. 이 배음 비중의 차이가 음색의 차이로 이어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자. 예컨대 기본음의 주파수가 100Hz이면 2배음은 200Hz, 3배음은 300Hz, 4배음은 400Hz이 된다. 파장이 감소하는 비율만큼 주파수가 증가하는 건데, 지금은 물리 수업 시간이 아니니 그냥 그렇다고만 이해하자. 알다시피 주파수가 높을수록 우리는 높은음으로 인식한다. 그러니 기본음보다 2배음이, 2배음보다 3배음이 높은음이라는 의미다.
같은 음을 연주하더라도 피아노보다 바이올린의 음색이 더욱 예리하고 날카롭게 들리는 이유는 8배음, 9배음, 10배음, 11배음 같은 높은 주파수의 배음 성분이 피아노보다 더 풍부하기 때문이다. 중첩되어 울리는 배음 중에서 높은음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으니 음색이 날카롭고 찌르는 듯한 색깔을 갖게 된다.
이러한 배음은 피아노라는 단일한 악기 사이에서도 차이가 있어서 현의 재질이 무엇인지, 울림통은 어떤 나무로 만들었는지, 피아노의 크기와 구조는 어떠한지, 현을 때리는 해머의 구조와 재질은 어떠한지 등에 따라 달라진다. 업라이트 피아노는 그 크기와 외형 및 구조의 한계 때문에 그랜드 피아노만큼 풍부한 배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드뷔시가 명백하게 피아노의 배음 효과를 노리고 작곡한 <달빛>은, 그런 의미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위한 곡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집에 그랜드 피아노를 들여놓고 <달빛>을 연주하며 경험했던 놀라운 소리의 입체감을 통해, 드뷔시라는 작곡가가 피아노라는 악기에 대해 얼마나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는지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드뷔시의 곡을 실연이 아닌 녹음으로만 접한다면 그 매력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드뷔시는 자신의 곡에서 이러한 특유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전통적인 화성법 체계에서 금기시하는 5도 및 8도 병진행이나 허용 범위 바깥의 불협화음 등을 과감하게 사용하고, 천편일률적인 장∙단음계를 벗어나 온음음계, 5음 음계, 교회선법 등을 적극적으로 채용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이라는 본질에 집중하며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회화기법을 뛰어넘었듯이, 드뷔시는 소리라는 본질에 집중해 전통적인 화성법과 음계의 울타리를 과감하게 뛰어넘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드뷔시는 현대음악의 선구자라 할 만하다.
어쨌든 그렇게 나름 풍부한 배음을 탐닉하며 중고 삼익 그랜드 피아노와 다섯 해를 보냈다. 종종 낙원상가에서 체험했던 야마하나 가와이가 떠오를 때도 있었지만, 내 주제에 삼익 그랜드도 과분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연주하는 한 시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2년여 전 종로구청 한우리홀에서 종로구민을 대상으로 <1만 원보다 1시간이 소중하다>라는 제목의 행복론 강의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강의 시작 30분 전에 도착해서 한우리홀을 둘러보는데 놀라운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무려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대당 가격이 억대를 훌쩍 넘어가는 세계 최고의 브랜드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