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5월 3일, 옛 인천시민회관 사거리에 몰려든 시위 인파.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야당 정치인과 사회민주화를 외쳤던 다양한 세력이 이날 시위에 참여했다. 이 시위는 ‘5.3사태’로 불리고 있다.<사진제공ㆍ30주년 인천 5.3민주항쟁 계승대회 조직위원회>
한만송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긴박하게 움직였다.
1986년 연초에 두 공동의장과 이민우 고문이 3자 회동을 갖고 연내 민주화일정을 확립하고, 2월부터 '1천만 명 개헌서명운동'을 본격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민추협의 개헌촉구에 대해 정부는 '89년 개헌' 입장으로 맞섰다. 민추협과 신민당은 이에 대해 총선승리 1주년인 2월 12일 기습적으로 '직선제개헌 1천만 명 서명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언했다.
민추협과 신민당은 1986년 말까지 국민 1천만 명의 서명확보를 목표로 3월부터 5월까지 전국 주요 대도시에서 개헌추진 시도지부 결성대회 및 현판식을 갖기로 했다.
정부의 탄압이 가중되었다.
1천만 명 서명운동과 관련하여 민추협사무실에 압수수색영장이 발부되어 12일간 사무실 출입이 봉쇄되고, 김대중 공동의장은 다시 자택에 연금되어 전화단절ㆍ외부인출입이 봉쇄되었다. 김영삼 의장도 가택연금과 강제귀가 조치를 당했으며 45명의 회직자가 연행되었다.
이런 탄압 속에서도 3월 11일 서울시지부 결성대회를 시발로 시도지부 결성대회를 강행했다. 시도지부 결성대회는 많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수만 명의 시민들이 대회에 참석했다. 특히 광주대회의 경우 30만 명의 인파가 운집하여 심야에는 가두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개헌서명운동에는 재야 세력의 적극적인 협력과 연대가 있었다. 3월 17일 두 공동의장과 이민우 총재는 문익환 민통련의장, 박형규 한국NCC위원, 이돈명 한국가톨릭정의평화위원장 등과 회동하고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민국련)'을 결성하여 개헌서명운동에 동참하기로 했다. 재야의 핵심세력이 개헌투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개헌서명운동은 한층 동력을 받게 되었다.
민추협은 KBS 등 TV방송의 왜곡 편파보도에 항의하여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을 전개하고 스티커를 제작하여 시도지부 결성대회에서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인천 및 경기도지부 결성대회가 5월 3일 인천에서 예정되었다. 그러나 4월 30일 이민우 신민당총재가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좌익 학생들을 단호히 다스려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함으로써 재야ㆍ운동권에서는 이를 "보수야댱의 본질을 드러낸 것" 으로 규정하고, 5ㆍ3인천대회에 4천여 명의 재야ㆍ학생ㆍ노동자들이 대회장을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경찰의 무력진압으로 이날 대회는 무산되고, 재야세력과 민추협ㆍ신민당의 관계는 이념과 노선에서 균열상을 보이게 되었다.
5ㆍ3인천사태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정부의 대대적인 노동자 검거사태를 불러왔으며 수배자 검거과정에서 부천서 성고문사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민추협은 안정된 사무실 하나도 제대로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여 투쟁의 강도가 심해지면서 정부의 압력으로 건물주들이 번번히 입주를 거부했다. 종로구 관훈동 근학빌딩에 새 사무소를 계약했으나 당국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한 달 여 동안 당국과 실랑이를 벌이면서 '입주투쟁'을 벌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