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민주당 현판식(198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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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기에는 이탈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민우 총재가 '대통령직선제개헌' 에 역행하는 돌출발언을 했다. 여권의 내각제개헌을 수용하는 듯한 이른바 '이민우 구상' 이 나온 것이다. 이민우 총재는 6월 3일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여야 영수회담을 갖고, 6월 21일에는 노태우 민정당대표와 단독회담을 열었다. 여권수뇌부와 가진 일련의 회담에서 직선제 개헌을 포기하고 내각제안을 수용하기로 작심한 듯했다. 국회에 헌법개정 특위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민정당은 내각제개헌, 신민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각각 제안하여 개헌특위가 난항을 겪는 상태에서 건국대 사태가 발생하고, 재야단체 민통련의 해산명령, 민정당의 87년 예산안 단독처리, 이에 항의한 신민당의원 전원 의원직사퇴서 작성 등 긴장감이 고조된 상황이었다.
'이민우 구상'이 나오자 민정당이 이를 적극 수용한데 반해 신민당은 '대통령직선제당론 불변, 민주화의지 촉구' 쪽으로 결론을 내고, 해가 바뀐 1987년 1월 7일 두 공동의장이 회동, 내각제 협상기구 거부, '이민우 구상' 은 직선제 당론 희석이라는 데 합의했다. 이에 따라 이총재는 "더 이상 당을 이끌 수 없다" 면서 충남 온양으로 내려갔다.
이 발언과 저간의 행동으로 이 총재에 대한 두 공동의장의 불신은 돌이키기 어렵게 되고, 개헌현판식과 관련 당내 비주류 세력의 폭력행사가 계속되면서 신당창당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3월 12일 상도ㆍ동교동계의 신민당의원 70명은 이른바 '당내 불순세력' 과 결별을 선언하고 새로운 통일민주당(민주당)의 창당에 나섰다. 신민당 90명의 소속의원 중 74명이 탈당하여 신당에 참여함으로써 신민당은 교섭단체 정족수도 못되는 군소정당으로 전략하고, 신당이 새로운 정통야당의 법통을 이어 받아 대여 투쟁의 구심이 되었다. 대통령직선제개헌투쟁도 속도를 더해갔다.
이민우는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신민당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11월 6일 신민당총재직과 의원직의 사퇴를 발표하고 정계를 떠났다. 이민우는 두 김씨의 대리인으로 신민당총재에 추대되어 개헌현판식 과정에서 한 때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일련의 돌출행동으로 몰락하고 반독재 민주투쟁전열을 혼란시켰다는 평가가 따랐다.
신민당과 민추협이 이민우의 돌출행동으로 혼란을 겪고 있을 무렵 서울대생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다.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한 조사를 받던 중 수사요원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등의 고문으로 박종철군이 숨졌다. 당초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 며 단순 쇼크사로 발표했으나,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이 이 사건은 박지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 대공간부 3명이 축소 조작했으며 고문가담 경감이 모두 5명으로 드러나면서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와 내연하던 민주화 열기가 다시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