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왜성대공원일본인들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주둔지 근처에 조성한 공원. 남산 일원이 왜인들의 주된근거지가 되는 시발점이 되었음.
서울역사아카이브
청일전쟁이 끝나자, 한양에 세거를 이루려는 일본인들 압력이 거세진다. 일본 거류민이 늘어나자 조선정부는 1897년 일본인들에게 왜장대 일원 땅 1만㎡를 조차(租借)해 준다. 그들은 그곳에 임진왜란 때 자국 군대가 주둔한 뜻을 기려 왜성대공원을 조성한다.
이런 움직임에 벵카르트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는 왜성대공원 서쪽 땅을 눈여겨보기 시작한다. 회현동 1가 부근에서 영사관 부지를 물색하던 벵카르트에게 희소식이 날아든다. 연산군에 반기를 든 정광필 이후 대대로 회현방에 세거를 형성하던 명문세가 동래 정씨 소유 토지가 싼 가격에 매물로 나온 것이다.
그는 '토지자본이득'을 셈한다. 건물규모에 상관없이 가급적 넓은 토지를 확보하려는 목적이다. 그래야 나중 매각차익을 톡톡히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투기전략'이다. 쇠락해 가는 정광필 후손들을 설득하자, 회현동 1가 14번지(지금의 우리은행 부지)가 1902년 벨기에 수중에 떨어진다.
회현동에 부지를 마련하여
벵카르트는 설계에 착수한다. 다시 주판알을 튀겨본다. 대한제국은 서양식 건물설계와 시공에 아무런 기술력도 경험도 부족하다. 한양에 들어와 있는 서양인 건축가들은 단가가 비싸다. 그렇다고 본국에 설계를 요청하기에도 시간과 비용측면에서 난망이다.
이제 막 신흥국으로 떠오르는 일본이 제격이다. 서구식 건축을 수업한 기술자들도 제법 포진해 있다. 벵가르트의 계산은 일본 기술진 선택으로 이어진다. 그리 큰 규모가 아니어서 설계는 일사천리다. 이듬해인 1903년 착공에 들어간다.
벨기에 총영사 벵카르트가 총감독, 일본인 고타마 설계에 시공은 일본 토목회사 호쿠리쿠, 일본인 니시무라가 공사감독이다. 공사 와중에 러·일 전쟁이 발발하여 전쟁 물자를 제공하는 배후지로 전락한 한반도가 큰 피해를 입는다. 그 바람에 공기가 다소 길어진다. 영사관건물은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강탈당한 1905년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1500.83㎡ 규모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