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전 옛 모습 1911년 데이비슨이 서구식 정원을 석조전 앞에 설치한다. 석조전 앞 연못에 돌 거북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1938년 이전 사진으로 추정.
서울역사박물관
정관헌이 지어진 1900년 착공에 들어간다. 기단석은 창의문 근방에서 채석한 하얀 화강석이다. 공사는 심의석(沈宜錫)이 주도하고, 영국인 '카아트맨'이 돕는다. 1901년에 기초공사가 마무리된다.
구본신참(舊本新參)이라 했던가. 고종은 경운궁을 대한제국 정궁으로 삼고자 대대적인 중창에 들어간다. 1902년부터 중화전 등 주요 전각 공사에 박차를 가한다. 그 바람에 석조전 공사는 잠시 뒤로 미뤄진다.
1903년 중층의 중화전을 비롯한 전각들이 완성되어 경운궁이 '황제의 궁'으로 위용을 드러낸다. 그해 9월 석조전 공사가 재개된다. 설계자 하딩이 공사감독을 겸한다. 이듬해 봄 경운궁이 (일본의 소행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화재로 거의 전소되어 버린다. 불탄 궁궐을 다시 지어야 한다. 모든 공력이 여기에 쏠리자, 석조전 건립은 더딜 수밖에 없다.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주요 뼈대(골조)공사는 1905년 초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나라는 을사늑약으로 주권을 잃었고, 이듬해 경운궁 전각들이 재건된다. 석조전도 외관을 비롯한 주요 공종이 이때 마무리 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1906년 하딩이 공사감독에서 해임되고 영국인 '데이비슨'이 위촉된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나라의 입법·사법·행정이 일본 손아귀에 떨어지고, 황제가 강제 퇴위 당한 1907년에 군대마저 해산되어 버린다. 나라는 껍데기만 남았고,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난다. 실내장식과 난방설비, 위생처리시설 등의 설치를 남겨 놓은 집의 공사가 이런 와중에 순탄했을 리는 없어 보인다. 그해 말에 가까스로 실내공사에 착수한 것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