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답사 노트에는 홍범도와 백선엽의 생애를 대조하는 메모가 가득했다. 백선엽은 자칫 밋밋할 뻔한 이번 답사를 다채롭게 만들어 주었다.
서부원
'홍범도와 백선엽'. 고민 끝에 떠올린 주제다. 홍범도와 백수를 누리다 작년에 현충원에 안장된 백선엽의 삶을 찾아 대조해보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소재가 될 것이라 봤다. 더구나 두 무덤은 쉬엄쉬엄 걸어도 채 5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다.
굳이 두 인물의 삶을 아이들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들의 손엔 스마트폰이 있고, 묘비의 앞뒷면에도 그들의 면면을 보여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그것들을 조합하고 서로 대조해보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다. 빛나는 독립운동에 대해서, 또 질곡의 우리 현대사에 대해서.
이 한 마디는 건넸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조국에 모셔진 건, 우리 현대사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그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는 물구나무선 가치관을 바로잡고, 통일에 대한 염원을 북돋우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그의 이름을 낯설어했다. 그들과 길거리에서 국외 무장 독립전쟁의 두 영웅, 홍범도와 김좌진에 대한 인지도를 조사한 적이 있다. 패널에 붙은 스티커 수는 비교가 안 됐다. 아이들은 물론, 오가는 시민들조차 홍범도를 잘 알지 못했다.
천출과 사회주의자라는 편견을 걷어내면, 독립운동가로서 홍범도의 업적은 김좌진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무장 독립전쟁의 경력과 전과는 외려 홍범도가 한 수 위다. 김좌진이 명문가 출신의 계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라는 점, 게다가 젊은 나이에 암살당한 비극적 생애가 도드라져 보인 이유가 아닐까 싶다.
대한민국 건국훈장의 권위
알다시피, 홍범도는 교과서에 실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초기의 거의 모든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단지 교과서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을 뿐이다. 1895년 을미의병 때 유인석 부대와 연합작전을 펼쳤고, 1907년 정미의병 때 함경도 지역에서 포수로서 이름을 떨쳤다.
이후 연해주로 건너가 권업회 활동을 주도했으며, 3.1운동 직후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이끌었다. 직후 결성된 대한독립군단 부총재로 추대되었고,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 1937년엔 스탈린에 의해 한인들과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이렇듯 불세출의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전쟁 영웅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예우는 작년까지 2등급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이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최규하 등 역대 대통령과 심지어 쑨원과 장제스 등 중국 국민당 정부 인사들까지도 받은 1등급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홍범도는 여태껏 받지 못했다. 물론, 김좌진도 1등급 훈장 수훈자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1등급 훈장 수훈자 중에는 베트남 패망의 원흉이자 부패의 상징인 당시 베트남공화국 대통령 응오딘지엠도 있다. 나아가 미국에서 이승만을 보좌하던 비서인 임병직조차 이름을 올렸으니 더 말해서 무엇할까. 이는 대한민국 건국훈장의 권위 문제다.
어쨌든, 적어도 훈격에서 홍범도는 김좌진, 안중근, 윤봉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고향도, 미천한 신분도, 사회주의자라는 이념도 역사적 평가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보여주었다. 북한도 그의 유해가 우리에게 봉환되는 걸 더는 문제 삼지 않고 있다.
그가 활약했던 시기에 사회주의는 해방을 염원하고 항일의식을 벼리는 도구였다. 그것이 홍범도의 공적을 폄훼하는 이유가 될 순 없다. 천출이라는 신분에도 독립운동에 발 벗고 나선 것 역시 상찬하고 존경할 일이지 무시하고 조롱하는 건 몽매한 짓이다.
이태 전 영화 <봉오동 전투>가 개봉되면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이번 유해의 봉환으로 그는 독립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우뚝 섰다. 만약 지금 홍범도와 김좌진에 대한 인지도를 조사한다면, 예전과 같은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홍범도는 그때의 홍범도가 아니다.
스마트폰을 켠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