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티셔츠' 뒷면. 도안은 물론 배치까지도 아이들이 정했다. 한자에 젬병인 아이들도 '불원복'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서부원
기다리던 '통일 티셔츠'가 제작되어 나왔다. 지난 방학 때 도안 공모를 시작할 때만 해도 시큰둥해하던 아이들도 받은 티셔츠를 입어보더니 연신 신나 한다. 예쁘다고, 세련됐다고 입소문이 나면서 인근 중학교 교사들까지 구할 수 없느냐고 전화를 걸어온다.
이게 뭐라고 참 행복하다. 방학 때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애쓴 보람이 있다. 도안 공모전 포스터를 게시판에 붙였을 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아 내심 걱정이 태산이었다. 학급별로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할애해 공모전 분위기를 띄워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애꿎은 각 반 실장에게 학급별로 최소 한 점 이상 작품을 제출하라며 을러대는 내 모습이 한심하기도 했다. '울며 겨자 먹기'라는 자괴감도 들었고, 한편으론 행사를 위한 행사 아니냐는 반성이 들기도 했다. 통일교육이라기보다 차라리 억지 춘향식의 과제라는 생각에서다.
공모전 마감 사흘을 앞둔 날까지 단 한 점의 응모작도 없었다. 솔직히 그땐 통일교육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학급 담임교사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물론 그릇된 몽니인 줄 안다. 애초 통일교육을 시작하겠다고 나서기 전 동료 교사와의 공감대 형성에 소홀했던 내 책임이 크다.
다른 프로젝트를 구상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바로 그때, 여러 작품이 한꺼번에 접수됐다. 이거다 싶은 건 눈에 띄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갑작스러운 관심에 약간의 흥분이 일었다. 마감날 응모한 아이들이 삼삼오오 찾아와 서로의 작품을 비교하고 칭찬하는 모습이 대견했다.
20400815 불원복
심사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요즘 아이들의 컴퓨터 활용 능력은, 말 그대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포토샵과 동영상 편집기 등 웬만한 프로그램을 아예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수준이다. 하여 컴퓨터를 활용한 디자인 실력보다 도안에 담으려는 의미에 주안점을 뒀다.
무궁화꽃을 한반도 모양으로 꾸미고, 남북 정상이 악수하는 장면을 형상화한 것은 어디서 많이 본 듯 익숙했다. 하늘색 한반도기 위에 나는 흰 비둘기도 식상하긴 마찬가지였다. '하나 되는 대한민국'이라는 글자로 한반도 지도를 그린 건 세련됐지만 의미가 너무 단순했다.
그런가 하면, 한반도기를 가운데 두고 태극기와 북한의 인공기를 반쯤 섞어놓은 도안도 있었다. 태극기와 인공기가 만나 한반도기가 된다는 게 요지였다. 컴퓨터 작업을 거친 완성된 도안이 아니라 스케치인 데다, 인공기가 그려진 옷은 자칫 현행법에 저촉될 수도 있는 문제라 무척 조심스러웠다.
통일 티셔츠는 '20400815'와 '불원복(不遠復)'을 함께 새긴 도안으로 최종 낙착됐다. 처음엔 무슨 의미인가 싶어 좀 의아했다. 2040년 8월 15일이 대체 무엇을 상징하는지, 그리고 불원복과 통일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했다. 출품한 아이의 설명은 이랬다.
통일을 언제쯤 이룰 수 있을 것 같으냐는 질문에 아이들의 대답은 양극단으로 갈린다고 한다.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경우와 머지않아 갑자기 닥친다는 두 가지. 다른 답변은 거의 들을 수 없다며, 100년 뒤쯤 가능하다는 답변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것을 이른 시일 내에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영원히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통일의 가능성은 시간과 정확히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남과 북 사이의 이질감이 커지다 보면, 북한은 통일이 아닌 '외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통일에 대한 그의 생각은 '낭만적'이었다. 6.25 전쟁의 참화를 직간접적으로 겪은 분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안 계실 2040년쯤에는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태어났다면 90세가 되는 때이니, 적어도 '빨갱이'라는 막말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