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기념성당 아래 지하에는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성당이 있고, 뒤편에는 순례길이 정비되어 있다.
박기철
그런데 미군과 전투 중이던 4월 24일께에 부평도호부사 이기조가 조정에 보고를 올린다. 그 내용은 미국 배에 일부 조선인들이 길 안내자로 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영종방어사 역시 세 명의 조선인이 적군의 배에 타고 있다는 보고를 추가로 올린다. 이에 고종은 '서양 오랑캐와 화친을 말하는 자는 매국의 죄로 다스리라'라며 크게 분노했다.
보고서에 나온 조선인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고종과 조정은 그들을 천주교도로 단정지었다. 거기에는 병인양요(1866년)의 영향이 있었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때문에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조선 땅이 더럽혀졌으니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수많은 교인들을 붙잡아 처형했다.
이후로 천주교도들은 서양 침략자들의 '내응자(內應者: 적 또는 외부와 남몰래 통하는 사람)'이자 '서양 오랑캐를 인도해온 근원이기에 뿌리까지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신미양요 당시 미군함에 타고 있던 조선인 역시 자연스럽게 천주교도일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5월 6일에 정박해 있는 미군함을 살피다 붙잡힌 이연구 형제가 제물진두에서 처형당했다. 특히 이들의 처형은 미국인들이 보는 앞에서 진행됐는데, 이는 미국에 대한 시위의 의미로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6월 1일에는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 등 세 명의 천주교 신자가 붙잡혀 강화도 갑곶돈대에서 처형당한다. 이들이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이유였다. 당시엔 미국 군함에 왕래한 사실 자체가 이적 행위였고, 천주교도의 매국 행위였다. 일부에서는 이들이 단지 신앙의 문제로 미군함을 왕래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확실하지는 않다.
이후 천주교 인천교구는 이들이 희생된 갑곶돈대의 부지를 매입해 2000년에 기념성당과 순교자삼위비 등을 세우며 순교성지로 꾸몄다. 그리고 이곳은 아름다운 풍광과 고즈넉한 분위기로 천주교인뿐 아니라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