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경의 소설집 '속된 인생'작가 김하경은 사당동 철거 싸움에 참여한 이후 소설가가 되어 「속된 인생」, 「바위가 파도에게」, 「별 아래 횃불 들고」 등 자신의 철거 싸움 경험을 담은 철거민 이야기를 단편 소설로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김학규
<내 사랑 마창노련>으로 유명한 작가 김하경은 사당동 철거 싸움에 참여한 이후 소설가가 돼 <속된 인생> <바위가 파도에게> <별 아래 횃불 들고> 등 자신의 철거 싸움 경험을 담은 철거민 이야기를 단편 소설로 남겼다.
교사와 방송 작가로 생활하던 김하경은,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 처방에 따라 사당동 철거촌에 사는 파출부 아줌마를 고용하면서 사당동 철거 싸움에 관여하게 됐다고 한다. 그 파출부 아줌마가 철거 문제를 의논해 온 것이다.
김하경은 이후 철거민과 빈민운동 하는 사람들을 연결시켜 줄 목적으로 철거문제를 잘 아는 사람을 수소문하러 돌아다녔고, 그때 처음 찾아간 곳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당시 집행위원장 김병곤)이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도 사당동 철거 싸움에 연대의 손길을 뻗치게 된다. 김하경은 이어 가톨릭빈민문제연구소나 빈민사목회 그리고 빈민활동 하는 청년들과 알게 되면서 철거 싸움에 스스로도 빠져들게 됐다고 한다.
김하경은 3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30여 년의 세월보다 더 진한 삶을, 이곳의 아줌마 아저씨들과 웃고 울면서 살게 됐다고 기억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는 아줌마 아저씨들과 함께 최루탄 속을 뚫고 뛰어다녔고, 한밤중 산동네 골목을 누비며 집집마다 유인물을 몰래 넣어주고는 포장마차에서 뜨거운 오뎅 국물을 맛있게 먹기도 했다.
글쓰기에 관심이 많던 김하경은 사당동 철거싸움에 참여하면서 '산 24번지'라는 제목의 지역신문을 발간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산 24번지'는 소식지 성격이 강했으나, 지역주민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실어 지역 주민 상호간 이해와 공감을 넓혀 연대의 분위기를 확산하는 역할도 했다.
김하경은 1987년 당시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마지막 철거싸움에서, 다리뼈에 금이 가는 부상까지 입고 약 두 달을 사당병원에 입원해야 하기도 했다. 김하경은 그때까지도 자신을 활동가나 운동가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자신도 모르게 현장에서 조직하는 활동가가 되어 있었을 정도로 그 삶에 빠져들었다는 것.
사당동 싸움이 끝난 후 퇴원한 김하경은 서울빈민연합을 조직하고 사당동, 봉천동, 서초동, 낙골 등에 놀이방을 세웠다. 봉천동에서 일용공노조를 만드는 일도 했다. 김하경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정말 그땐 신들린 듯 일에 미쳐 있었어.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었어"라고 회고했다.
민중가요 '민중의 아버지'와 '빈민의 함성' 만든 김흥겸
김흥겸은 연세대 신학과 출신으로 관악구의 난곡에서 1983년부터 난곡 낙골교회 담임 교육전도사가 돼 낙골야학을 운영하면서 도시빈민운동에 평생 헌신한 인물이다.
김흥겸이 사당동 철거 싸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6년부터 김해칠이라는 가명으로 '서울시철거민협의회'의 연대사업차장과 사무국장 등을 맡아 활동하던 중 상계동, 양평동 등 다른 지역의 철거반대 투쟁에 함께했는데, 이때 사당동 철거반대 투쟁에도 참여하게 됐기 때문이다. 김흥겸은 1991년에는 신대방동 철거투쟁에 참여했다가 구속돼 3개월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김흥겸은 음악에 재질이 있었는데, 그가 남긴 민중가요 8곡 중 특히 '민중의 아버지'와 '빈민의 함성'은 철거 싸움을 하던 도시빈민들이 투쟁의 현장에서 즐겨 부르던 애창곡이었다. 김흥겸은 1997년, 불과 서른여섯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다.
민중의 아버지 / 김흥겸 시, 곡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나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 당한 하나님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있을까
쓰레기 더미에 묻혀버렸나 가엾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 당한 하나님
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노동해방의 나팔수', 노동가요 작곡가 김호철
노동가요 '파업가'와 '단결투쟁가' '포장마차' 등을 작곡한 김호철은 사당동 철거지역에 살았다. 김호철이 노래에 집중한 최초의 경험은 육군군악대 시절이었다. 한국체대에서 태권도를 전공하던 김호철은, 3학년이던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한국체대 학생회장으로 5.15 서울역 회군에 반대한 원칙파였다.
그는 전국학생회장단회의에도 참석한 탓으로,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치인과 학생운동가를 잡아들일 때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합수부에 연행돼 고문을 당한 끝에 투옥되기도 했다. 이어 강제징집으로 군대에 갔는데, 하필 육군 군악대였다.
김호철은 1985년 자신이 살던 사당동이 재개발 지역이 되면서 세입자대책위 일에 뛰어든 것이 그의 삶을 바꿔놨다. 그는 이어 노동현장에 투신한 여동생의 권유로 1986년에 구로공단에 '취업'했고, 이듬해 해고됐다.
'파업가'는 구로공단에서 기타반을 운영할 때 작곡한 노래였다. 그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경과하면서 1988년 봄부터 서울노련 문화국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단결투쟁가'와 '전노협진군가' '끝내 살리라' 등 노동자들을 위한 새로운 노래를 줄기차게 만들었다.
김호철이 1988년부터 2000년까지 작곡한 노래는 작사 88편, 작곡 114편으로 작사·작곡 모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민중가요 최대의 작곡가이자 작사가였다. 당시 왕성하게 쏟아져 나오던 민중가요(1987~2000)에서 김호철의 작품은 작사 7%, 작곡 9%를 차지할 정도여서 '민중가요 자판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김호철은 자신의 노래가 일하는 이들의 삶을 대변하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를 희망해왔다. 민중가요가 등장하기 전에는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외면했던 한국의 노래문화는, 김호철을 비롯한 민중음악인들의 노력으로 비로소 그들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라는 말이 부끄럽고 불온하게 느껴지던 세상에서 김호철의 노래는 노동자의 자존심과 긍지를 되찾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노동해방의 나팔수'로도 불리는 김호철은 2000년대에도 사당동 자신의 집을 스튜디오로 두고 작사·작곡 활동을 지속하고 있으며, 인터넷방송 <노동의 소리>를 운영하고 있다.
달동네 파수꾼 사당의원과 김록호·김종구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