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의 방북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경향신문 1면(1989. 3. 28) 문익환 목사가 1989년 3월 정부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북한을 방문하여 북의 김일성 주석과 회담한 일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있다.
경향신문
문익환 목사가 1989년 3월 정부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북한을 방문하여 북의 김일성 주석과 회담한 일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있다. 문익환은 이 회담에서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가지고 있던 김일성을 설득하여 본인이 주장하는 연방제통일 3단계론을 사실상 수용하도록 하는 성과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공동 발표문 4항에서 "남북 쌍방이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할 필연적 통일 방도이며 이는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고 하여 북이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처음으로 수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 합의는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에 이루어진 '6·15 남북 공동선언'에 나오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개념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정부의 통일논의 독점에 익숙해 있던 대중에게 큰 충격을 줌과 동시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다.
불과 4년 전인 1985년에는 국회의원(유성환 의원)이 국회에서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이기보다는 차라리 통일이어야 한다"고 한 발언도 문제 삼아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고 감옥살이를 하던 나라였지만,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겪으며 그동안 금기시되어 왔던 통일에 대한 관심이 점차 고조되던 시절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는 이를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빌미로 삼아 오히려 민주화 운동 세력을 강하게 탄압했다.
사당동에 있던 중원엔지리어링의 유원호와 문익환 목사는 어떤 관계?
문익환 목사의 방북에는 소설가 황석영,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그리고 유원호가 함께 했다. 소설가 황석영은 <장길산> 등으로 유명했고,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도 1970년부터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한국 사회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하던 인물이었다. 이에 비해 유원호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었다. 유원호는 원래 방북 대열에 합류할 대상이 아니었다. 문 목사는 아들 문호근을 데리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비자 문제가 생겨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급하게 유원호에게 부탁했는데, 유원호는 이에 기꺼이 응했다고 한다.
유원호는 동작구 사당동에 중원엔지니어링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대표를 맡고 있었다. 중원엔지니어링은 재일동포 2세인 스즈쿠 도시오가 회장으로 있는 일본 가드레일공업(주)과 합작해서 자본금 1억5천만 원으로 설립한 회사였다. 노태우 정부는 덜 알려진 유원호를 북한의 공작원으로, 유원호의 동생 유원철(중원엔지니어링 전무)을 조총련 등 반국가단체와 접촉한 창구로 몰고 가려고 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북의 공작에 의해 놀아난 결과물로 매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장덕빌딩(사당동 147-104) 3층에 있던 중원엔지니어링은 즉각 압수수색 대상이 되었다. 유원호의 동생 유원철도 임의동행 형식으로 안기부에 연행되어 밤샘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유원호나 유원철은 당연히 조총련이나 북한과는 무관한 인물이었다. 유원호는 고 김녹영 국회부의장의 비서 출신이었고, 김대중계에 속해 있었음에도 198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이 후보단일화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광주에서 김영삼 당선운동을 벌인 인물이었다.
9개 항의 '4·2 공동선언' 발표라는 성과를 이끌어 낸 문익환 목사 일행
문익환은 김일성 주석과 한 두 차례 회담에 이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인 허담과도 회담을 가진 후인 1989년 4월 2일, 인민문화궁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주적 평화통일과 관련된 원칙적 문제 9개항'이란 제목의 '4·2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합의 성명의 주요내용은 ①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에 기초한 통일문제 해결, ②정치·군사회담 진전을 통해 남북의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와 동시에 다방면의 교류·접촉 실현, ③연방제 방식의 통일, ④팀스피릿 훈련 반대 등이었다.
소기의 성과를 거둔 문익환 일행은 원래 판문점으로 내려오려고 했다. 그런데 북에서 이를 수용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노선을 변경해야 했다. 북에 더 머물기로 한 황석영을 제외한 문익환, 정경모, 유원호 등 3인은 중국의 베이징을 거쳐 도쿄로 왔고,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안기부에 연행될 것임을 안 이들은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방북 성과를 언론에 알렸다.
문익환 목사 일행의 수난과 당당했던 유원호 피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