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는 내가 하루 중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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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시작하고부터는 샤워하면서 글감에 대한 생각도 한다. 뭔가 떠오르면 잊지 않기 위해 최대한 집중하고 나오자마자 메모장을 켠다. 또 언젠가는 샤워커튼에 있는 얼룩과 글감의 연관성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는 샤워할 때 샤워커튼에 있는 얼룩을 연결해서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습관이 있는데 그게 꼭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에피소드들을 모아 하나의 글을 써내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그런 생각들을 하며 쏟아지는 물을 맞고 있으면 고민들은 사라지고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사춘기 시절의 스트레스도 나는 물과 함께 흘려보냈다. 우울한 날에는 책상 앞에 앉았다. 연애소설의 남자주인공이 떠나가는 이야기나 <연탄길>, <좋은생각> 같은 책에 나오는 우리 주변의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감정이 북받치면 엉엉 소리내어 울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 눈물을 쏟고 나면 어느새 우울감은 사라져 있었다.
책을 잘 읽지 않을 시절에는 슬픈 영화나 웹툰을 찾아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카테콜아민'이라는 호르몬이 있는데 이것은 스트레스 호르몬이라고도 불리고 감정적 눈물을 흘릴 때 몸 밖으로 빠져나간다고 한다. 우울한 날 내가 왜 슬픈 이야기를 찾았는지 알 수 있다.
한가지 안타까운 소식은 요즘에는 눈물이 잘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박정현의 '꿈에'를 부르면서 가사에 심취해 오열을 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분명히 울 타이밍이다' 하며 감정을 잡아보지만 나와야할 눈물이 나오지 않아 당황해 하고 있다. 현실의 때가 묻어버린 것인지, 나이가 들어가니까 그런 것인지. 조금 씁쓸하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찾은 다른 방법은 설거지와 화장실 청소다. 집안일은 다 귀찮지만 그나마 하고나면 보람차고 기분이 좋아지는 일을 찾아보니 그것 역시 물로 씻어내는 방법이었다. 설거지/화장실 청소하는 순간은 세상에 나와 쌓여있는 그릇/물때 둘만 남은 시간이 된다. 여기에 에어팟을 더하면 완전히 분리된 공간으로 들어간다.
요즘 식기세척기가 성능이 좋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오지만 아직 흔들리지 않았다. 직접 닦아내는 맛이 있다. 몽글몽글 거품을 내서 뽀득뽀득 닦아내고 물을 촤악 뿌리면 반짝반짝해진다. 접시도, 타일도, 내 마음도.
이쯤되면 누군가는 생각했을 것이다. '운동하고 땀을 흘리며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도 있는데..' 모르는 건 아니다. 운동을 사랑하는 동생 덕분에 누구보다도 잘 안다. 시도도 해봤다. 하지만 나에게는 운동중독보다는 샤워중독이 더 강력했다.
게다가 함께하는 사람들의 스트레스까지 날려버리는 물을 이용한 방법이 아직도 많이 있다. 맥주마시기, 수영하기, 비오는 날 창밖 보기 등. 여름밤에 샤워 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맥주를 마실 때의 그 기분, 상상만 해도 상쾌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