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관 신규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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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모도원(日暮途遠) -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고 아득하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오생기차타(五生己蹉跎)' - "몸은 쇠약한데 앞으로 해야 할 일은 까마득하게 많음"을 덧붙였다.
32세 때인 1911년에 망명하여 온갖 고초를 겪으며 임시정부의 초석을 놓고, 이승만이 잔뜩 어질러놓고 떠난 정부의 국무총리대리로서 수습에 나섰으나 난마와 같이 엉킨 실타래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큰 갈래는 기존의 임시정부를 고쳐쓰자는 개조파와 임정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이 수립하자는 창조파의 대결이었다. 이같은 대립은 임시정부 안팎에서 전개되어 독립운동전선의 총체적인 분열상으로 나타났다.
10여 년간 지극정성으로 공들여 쌓은 임시정부라는 희망의 탑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에서 신규식은 몸부림쳤다. 동지들을 만나 설득하고 호소했으나 방향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설상가상 격으로 중국광동정부(호법정부)의 분열상이었다. 광동의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쑨원에게 반기를 들고 혁명세력 요인들의 체포령을 내렸다.
호법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아내고, 중국혁명의 성공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그래서 두 정부의 관계를 운명공동체로 인식했던 터여서 충격은 더욱 컸다. 5월 이후 신규식은 임시정부의 분열과 동지들 사이의 적대로 심장병과 신경쇠약의 증세가 악화되고 있을 즈음에 발생한 진형명의 쿠데타 소식은 그를 병석에 눕게하는데 치명타가 되고 말았다.
중국혁명의 실패, 임시정부 변혁논의를 둘러싼 계파간의 극한 대립, 임시정부 내부에서 전개된 의정원과 대통령의 대립 등 한국독립운동이 운동방략을 두고 진통을 겪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신규식의 상심은 더욱 깊어졌으며 그로 인해 병도 날로 악화되어 갔다.
수면과 음식의 양이 날로 줄어들고 말수도 적어져 갔다. 다만 그 눈초리만은 전과 다름없이 예리하였으며 전보다 더 음울한 빛이 감돌았으나 몸은 날로 여위고 파리해졌다. 그래도 예관의 자태는 예전이나 다름없이 엄숙하고 단정했다고 전한다. (주석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