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문학연구회1920년대 외국 문학을 전공하는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만든 모임이다. 주로 번역 활동에 힘썼다. 1930년 연말을 맞아 외국어문학연구회 회원이 경성에서 모였다. 왼쪽 앞줄부터 감상용, 정규찬, 김온, 이선근, 유동석, 이하윤이다. 뒷줄 왼쪽부터 정인섭, 김한용, 김진섭, 이형우다.
소명출판
1926년 10월 김진섭은 당시 일본에서 유학하던 이하윤, 홍재범, 손우성, 이선근, 정인섭, 김명엽, 김온, 함대훈과 함께 '외국문학연구회'를 만들었다.
이중 와세다 출신 이선근은 훗날 서울대 교수, 문교부 장관을 지낸 후 성균관대와 영남대, 동국대 총장을 두루 거쳤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 초대 원장을 지낸 이선근은, 한국도서관협회 제11대 회장(1973-1977년)을 지내기도 했다. 이선근의 '처세술'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유명해서, '대원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외국문학연구회는 1927년 1월부터 <해외문학>을 창간해 연 2회 발행했다. 외국문학연구회와 <해외문학>의 출현은 한국 번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외국문학연구회가 일본어나 중국어를 통한 '중역'(重譯)이 아닌, 외국문학 작품을 직접 번역하는 '직역'(直譯)의 전통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번역학'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김욱동은 외국문학연구회와 그 기관지 <해외문학>을 이렇게 평가했다.
"외국문학연구회를 조직한 것은 문학 예술가들이 일제 식민주의의 문화적 예속에서 벗어나 번역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부르짖은 '번역문학의 독립선언'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발간한 기관지 <해외문학>은 곧 이러한 번역문학의 독립을 외친 '독립선언서'에 해당한다."
1927년 <해외문학>이 발간된 후, 양주동과 김억, 외국문학연구회 사이에 번역을 둘러싼 지상 논쟁이 <동아일보>를 통해 펼쳐졌다. 이 과정에서 축역(縮譯), 의역(意譯), 축자역(逐字譯), 자유역(自由譯)을 포함, 토착어와 외래어 사용 문제까지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유학생과 함께 외국문학연구회에서 활동한 김진섭은 세계문학을 국내에 소개하면서, 번역문학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1927년 3월, 김진섭은 호세이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했다.
생각지 않게 시작한 '도서관인'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