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중학교 후임 교장에 대한 기사숭실중학 교장이었던 윤산온(尹山溫)은 일제의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파면되었다. 윤산온이 물러나고 정두현이 숭실중학 교장을 맡게 됐다는 <동아일보> 기사다. 사진 왼쪽이 정두현, 오른쪽이 윤산온이다.
동아일보
1935년 11월 14일 평안남도 도지사 야스다게(安武)는 모든 학교에 신사 참배를 명령했다. 숭실중학교 맥퀸(George Shannon McCune, 한국명 윤산온) 교장은 이를 거부하다가 결국 파면당하고, 1936년 3월 21일 미국으로 떠났다.
맥퀸 후임으로 숭실중학교 교장이 된 사람이 정두현이다. 1936년 4월 새 학기가 되자, 신사 참배 강요와 맥퀸 교장 파면에 항의하며 숭실 학생들은 집단시위와 동맹 퇴학을 했다. 윤동주와 문익환, 장준하도 이때 숭실을 떠났다.
3.1 운동으로 옥고까지 치렀던 개신교 신자 정두현은 신사 참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신사 참배라는 굴욕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학생 교육을 위해 교장을 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두현은 어쩔 수 없이 숭실중학교를 맡았다.
결국 정두현이 몸담았던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는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반발하며 1938년 3월 18일 '자진 폐교'했다. 숭의여학교까지 세 학교가 문 닫은 이 사건은 '삼숭(三崇) 폐교'라 불렸다.
정두현은 1938년 4월, 타이완(臺灣) 다이호쿠제국대학(지금의 국립타이완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이때 그의 나이 무려 51세였다. 배움에는 때가 없다고 하나, 50세를 넘겨 '의학도'가 된 그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1942년 3월 의학부를 졸업한 그는, 다이호쿠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처음이자 마지막 조선인이라고 한다.
해방 후 정두현과 김인정 여사의 행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