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오판동 어르신은 지금도 괭이를 들고 청년처럼 콩밭을 일군다.
최육상
콩밭을 괭이로 일구는 오판동(100) 어르신은 흡사 청년 같다. "힘드시니까 쉬엄쉬엄하시라"고 말려도 귓등으로 듣는다.
지난달 29일 오후 전북 순창군 금과면 계전마을 오판동 어르신 댁으로 안내한 이근태 이장(83)은 "일하시는 기운은 젊은이도 못 따라 간다"며 "전남에서 태어나 우리 마을에 오신 지 한 오십년 됐다"고 어르신을 소개했다.
"식사도 잘하시고, 상여소리도 농악도 잘하셔요. 소리가 정말 좋아. 아내 돌아가신지 한 4~5년 됐나. 4남 2녀, 6남매를 두셨어요. 아버지가 혼자 되시니까 코로나 있어도 이번 명절에 다녀갔지."
전남 담양군과 전북 순창군 오가며 100년
오판동 어르신의 1921년 태자리인 전남 담양군 금성면 봉황마을과 지금 사는 전북 순창군 금과면 계전마을은 붙어 있다. 전남과 전북으로 나뉘지만 한 마을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어르신은 두 마을에서 50년씩 공평하게 산 셈이다. 언제까지 농사를 지으실 건지 여쭸다.
"작년까지 괭이 갖고 꺼먼 콩 숭궜는디(심었는데) 올해는 내 힘으로 숭궈질랑가 모르겠어. 조금 꼼지락거리면 숨이 헐떡헐떡 거려. 고향에 깨도 한 마지기 했는데 이젠 반 마지기나 할까. 올해는 땅 벌(일구는 것)도 안 하고 내버려 두게 생겼어. 원체 힘이 부쳐서 못 벌겠어."
어르신은 순창이 좋으시냐는 질문에 엉뚱한 답변으로 한바탕 웃게 했다.
"여기에는 친구가 집을 판다고 하도 사정사정해서 왔지. 농지도 없었는데 친구가 논 네 마지기(800평) 주마고 돈 벌라면서 집을 팔았어. 생전(평생) 벌라고 한 놈이 근디, (농사 지어) 1년 번 게로 인자, 논을 사라 안 하요. 거참."
"젊은 사람은 못 따라오게 밥을 묵어"
어르신의 건강 비결은 정말 단순했다.
"보통 여덟아홉 시에 자. 일어나는 건 대중없어. 일곱 시에도 인나고(일어나고), 여덟 시에도 인나. 새벽에는 잘 안 깨. 늦잠 잘 때는 여덟 시 넘어서 깰 때도 있고. 하하하. 내가 뭣이든 잘 묵어. 젊은 사람은 못 따라오게 남들 두 배씩, 밥을 많이씩 묵어."
어르신에게 생일을 여쭙자 "음력으로 9월 9일인디, 딸이 작년 내 100세 생일날 마을 주민에게 식사 대접하려고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못 했다"고 몹시 아쉬워했다.
짧은 만남만으로 100년을 이어온 어르신의 삶을 가늠할 수 없었다. 어르신은 어떻게 살아오셨느냐는 질문에 회한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
"아조(아주), 입에 털어 넣을 게 없어서 나 같이 죽을 고생깨나 한 사람은 없을 거요. 나무 껍딱, 풀잎들만 먹고 살았어."
전혀 감도 잡히지 않는 '고생길'
〈보릿고개〉 노래가사 그대로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 어르신. '억척스런 삶'만으로는 설명이 모자랐다.
"나무장시 이십 년 넘게, 지게 지고 다니면서 팔아 갖고 열 명이 먹고 살았어. 부모, 아내, 자식들(육남매)하고. 약나무(약초)는 다 캐 갖고 '순창장'에도 팔고 '담양장'에도 팔았어. 곶감꽂이까정 팔았으니께. 하이고(한탄), 생각허면 징허제(끔직하지)."
어르신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이야기를 계속 꺼냈다.
"봇짐도 큰 건 내가 다 지고. 없이 산 게, 한 닢이라도 더 벌라고 큰 거라도, 무거운 걸 져야 돈이 된 게 별짓 다 했어. 산 타러 다니면서 장작도 내 손으로 겁나게 패 갖고 내다 팔고. 아무것도 먹일 게 없는데 자식들 육남매를 키웠어. 나는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봤어."
버스도 없던 시절, 어르신은 태어난 담양에서 순창읍 장터까지 어떤 길로 다녔을까. 지게 가득 나무를 지고 걸었을 길, 전혀 감도 잡히지 않는 '고생길'이다.
16세 아내 "키 작아서 못 살게메 그러냐?"
화제를 바꿔 몇 살 때 결혼하셨느냐고 여쭸다. 어르신은 아내 이야기에 큰 웃음을 터뜨렸다.
"아내가 열여섯 살 묵어서 스물한 살 나하고 만났어. 지금 같으면 학생밖에 안 됐어. 얼굴도 안 보고 결혼한 첫날밤 '키가 왜 이렇게 작냐'고 했더니, '키 작아서 못 살게메(살까봐) 그러냐?'고 토라지데. 그 말을 안즉 안 잊어 불고 살아. 하하하. 결혼하고 큰 게 안 작은디, 그 때는 쬐깐하더라고.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