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한 일이 생겼을 때 마을주민이 활용하라고, 85세 이상 되신 어르신 자녀 연락처를 회관 벽에 붙여놓았다.
최육상
마을회관 한쪽 벽에 붙어있는 긴급 연락처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전북 순창군 금과면 대성마을 김기호(69) 이장과 대화는 연락처를 붙이게 된 사연으로 시작했다.
"이 분들이 우리 마을 85세 이상 되신 어르신이에요. 혹시 급한 일이 생기면 주민들보고 전화를 드리라고 자녀분 연락처를 붙여 놓았어요."
지난달 19일 마주한 김기호 이장은 "마을에서 내가 가장 젊고 어린 막내"라며 밝게 웃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김 이장에게 딱 들어맞았다. 마을의 막내, 예순 아홉 살 이장은 대화 내내 유쾌했다.
김 이장은 "여기가 고향인데, 광주에서 아이들 가르쳐 결혼시키고 다시 마을로 돌아온 지 이제 5년 됐다"며 "마을 나갔을 때가 서른다섯인가 여섯이었고, 예순 네 살에 돌아와 작년부터 이장을 했다"고 막내 이장의 정체를 밝혔다.
"제가 원체 어렵게 살았어요. 그때 당시는 논도 적고 해서 담배 농사도 짓고 누에도 치고 그랬어요. 내가 아들 하나, 딸 둘이에요. 막둥이 딸이 초등학교 1학년일 땐데 저는 당시 '없이 살아도 얘들은 가르쳐야 하지 않느냐' 해서 큰 아들을 5학년부터 어머니랑 형님이 계신 광주로 보냈어요."
소 여덟 마리 팔고 광주 전세방으로
아들을 먼저 보내놓은 다음, 딸 둘을 데리고 광주로 나가게 된 계기는 농촌 시골의 척박함 때문이었다. 김 이장은 딸 이야기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1990년인가, 그 땐 우리 마을 들어오는 길이 포장이 안 됐어. 자갈도 없고 순 황토 땅이야. 비가 오면 장화를 안 신고는 못 가. 어느 날 우리 딸이 신발을 들고 비를 쫄쫄 맞으면서 울고 와. 내가 '너희들을 가르쳐 놓고 다시 와야겠다'고, 이튿날 소 여덟 마리 있는 걸 싹 팔았어요. 어떻게 2000만 원을 만들어서 광주에 전세방을 얻었어요."
김 이장은 살던 집을 그대로 두고 떠났다. 아내가 광주에서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김 이장도 광주에서 일을 하다 주말이면 틈틈이 농사일을 도왔다. 부부는 억척스럽게 벌어서 자녀 뒷바라지를 했다.
생신ㆍ제사 때마다 마을주민 아침 대접
예부터 대성마을은 부모님 생신이나 제사가 있으면 아침에 주민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 김 이장은 "마을 주민이 모두 와서 아침밥을 드시게 아주 의무적으로 번갈아가면서 한 곳은 대성부락밖에 없었다"면서 "키우는 닭도 잡고, 잘 살든 못 살든 있는 대로 대접했다"고 푸근했던 과거를 회상했다.
그러나 본인 역시 농촌의 빈곤함 탓에 도시로 떠나있었듯, 세상이 변하고 자식들 가르치기 위해 먹고살기 힘들던 시골 마을을 하나둘 떠났다.
"나 어렸을 때만 해도 쉰다섯 가구가 있었어. 우리 마을이. 지금은 이십오 호, 마을 주민은 총 30명 정도 돼요. 여자 분이 열여섯, 남자 분이 열 넷. 여든 살 넘으신 분이 여덟, 아흔 살 자신 분이 한 분이야. 제가 부락에서 제일 어려요. 막내야 막내. 하하하."
김 이장은 막내라는 말을 하며 정말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는 "인자, 한 사람이 두릅나무 심고 마을로 들어올 가능성이 많다"면서 "그 사람은 예순 두 살, 이번에 대기업을 퇴직했는데 내가 막내 벗어나려고 살살 꼬시는 중"이라고 한바탕 또 웃었다.
코로나19로 마을회관과 경로당은 모두 문을 닫았다. 이전에 만났던 몇몇 이장은 모두 어르신을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며 마스크 등을 나눠드렸다고 했다. 김 이장은 발상을 바꿨다.
"저는 될 수 있는 한 뭐든지 회관에 와서 가져가시라고 해요. 왜? 당신 것만이라도 가지러 나오면 그만큼 운동이 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노인들을 생각하면 갖다 드리는 것이 예의지만, 우스운 소리로 '나는 운동을 좀 하쇼, 한 발이라도 떼는 것이 더 오래 사니까' 그러면 다들 웃고 나오셔. 하하하."
이장 맡은 지 1년 여 만에 대형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