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와 함께한 천세용 열사. 이때만 해도 보이스카웃 활동을 할 만큼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다.
천세용열사기념사업회
천세용 열사가 동북고 3학년 재학 시절,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가입을 이유로 여러 선생님들이 교단을 떠나야 했다. 열사는 동료 학생들과 전교조 선생님들을 지지하는 활동을 적극 벌여나갔다. 이를 통해 열사는 우리 사회의 모순을 인식했고, 이러한 비판의식과 역사의식은 대학에 와서도 이어졌다. 열사가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한 데에는 고3 때의 경험이 큰 작용을 했다.
열사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외할머니 밑에서 동생과 함께 자랐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낮에는 건설 노동일과 세차장 알바를 하며 학비를 벌었고, 야간 강좌에서 수업을 들었다. 어려운 형편에 일찍부터 사회를 경험해서인지 열사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관심이 높았고, 늘 고민과 생각이 많았다.
1990년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전자계산학과에 입학한 열사는 동아리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민족사연구회 '한얼'에서 역사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공부했고, 현대사연구회 '열린마당' 활동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런 동아리 활동을 통해 열사는 양심적인 지식인을 넘어 사회변혁 운동가로서의 삶을 자신의 기본가치로 삼았으며, 민중 승리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갖게 됐다. 열사는 운동대오 내의 정치노선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지만 바른 성격과 속 깊은 인간관계로 모든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열사는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학교에서 생활하다시피 했다. 낮에는 투쟁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했고, 밤에는 수업과 학습을 병행했다. 그런 열사에게는 자신의 몸을 편히 누일 변변한 자취방도 없었다. 당시 경원대는 동아리실 대부분이 진리관(C동) 지하에 위치했는데, 열사는 주로 여기서 먹고 자며 생활도 하고 공부도 했다.
열악한 환경 때문에 종종 피부병에 걸리는 일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신입생 후배들을 잘 챙겼고, 그래서 유난히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 한마디로 말보다는 실천으로 묵묵히 헌신하던 청년학도였다.
투쟁의 선봉 '횃불대' 대원이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