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균 열사가 치료를 받고 있는 대구 경북대병원에서 안동대 동료학생들과 대구지역 대학생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마이크를 잡고 있는 이는 당시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필자의 모습이다.
사진제공 권우성
슬픔도 허락되지 않았던 91년 5월
영균은 1971년생, 서울 대원고를 다녔다. 고등학교 재학 시 교육 민주화를 위한 학생 소모임 '목마름'에서 활동했다. 90년 안동대학교 민속학과에 입학. 학생회 산하 '민속문화연구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지냈고, 학내 교지편집위원회 활동을 했다. 8월에는 조국통일 범민족대회 통일선봉대에 참가했고 농활에 참여했다.
91년에는 민속학과 학생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고, 4월 학원자주화 투쟁 과정에서 총장실 단식 농성에 이름을 올렸다. 5월 1일 '고 강경대 열사 추모 및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안동대인 결의대회' 집회에 앞선 12시 30분경 분신, 5월 2일 저녁 8시 13분 경북대 병원에서 운명했다.
추모집에 실린 스무 살 청년의 약력은 간단하다. 그러나 고등학교 재학 시 전교조 해직 교사들의 출근이 교문에서 막히자 서명을 주도하고 철야농성에 동참하며 졸업식장에서 리본을 나눠주고 참교육을 외쳤다는 건 제자의 영정 앞에 선 은사의 처절한 회고사 내용이었다.
전태일 열사를 형이라 부르고 싶다던 영균. 그는 '나의 생활이 너무도 평화롭기에 행여 당신의 존재를 망각할 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라는 글을 모란공원 참배 후기로 남겼다. 대학 1학년 때였다. 제 몸 불살라 끔찍한 노동환경을 고발한 전태일 열사. 그를 형이라 부르고자 했던 영균이가 노동절인 5월 1일에 제 몸에 불을 붙인 건 우연일까 하는 의문이 오랫동안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