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나혜석 거리의 나혜석 동상수원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혜석 화가는 우리나라 근대를 대표하는 여성화가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근대사 만큼 그녀의 일생도 다사다난하게 흘러갔었다.
운민
하지만 나혜석 화가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인계동에 그녀를 기려 만든 보행자 거리인 '나혜석 거리'를 방문해 보길 추천드린다. 효원공원에서 도로를 건너면 제법 넓은 나혜석 거리가 바로 보인다. 주변은 도회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상권이라 다른 장소랑 차별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 점이 아쉬웠지만, 바닥에 검은 돌로 그녀의 일대기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한복 차림을 한 나혜석 화가가 다소곳한 차림으로 앉아 있다.
나혜석 화가의 생에는 우리 근현대사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사다난했다. 나혜석은 나 참판댁 또는 나 부잣집이라고 불리는 경기도 수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집안 자체가 부잣집이었고,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는 등 부족함이 없는 삶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보다 어린 첩을 두고 어머니와 자신을 차별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 남성 중심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나혜석은 그 이후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여자도 인간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명절이 여자들에게만 일을 시키는 고통스러운 날이라고 지적했고, 결혼을 여성을 억압하고 옥죄는 족쇄라고 판단했다. 당시 사회상으로서는 정말 파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일본 외무성 외교관이었던 남편 김우영을 따라 1년 8개월에 걸쳐 유럽, 미주 등을 여행했다. 한국 여성 최초의 세계일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남편과의 세계일주 중 파리에서 최린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 후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손가락질 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세 아이를 빼앗기고 빈털터리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그림과 세상에 대한 분노였다. 그녀는 '이혼 고백서'를 통해 세간을 한 번 더 들썩이게 했다. 그러나 그녀가 목소리를 낼수록 세상 사람들은 나혜석에게서 더욱 더 등을 돌렸다. 사생활을 이유로 미술전람회 입상을 박탈당했으며,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문을 연 미술강습소 역시 철저히 외면당했다. 말년에는 불교에 의탁해 수덕사 아래 수덕여관에서 한동안 생활하다가 결국 거처없이 떠돌게 된다. 그는 결국 찾아오는 이 없는 병원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사회의 불합리한 관습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걸었던 신여성 나혜석, 불꽃 같았던 도전적인 삶은 현대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나혜석 거리의 반대편에는 한복을 단정하게 입은 동상과 대비되는, 신여성의 복장을 한 나혜석 상의 모습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녀의 일생과 지나간 발자취를 돌아보며 나 자신도 주체적인 삶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보았다.
거대한 변기를 닮은 건축물, 그 정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