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월 24일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를 열었을 당시 모습.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러시아 핵문제와 이란 핵문제 모두 미국의 국익과 관련된 사안이지만, 두 문제의 또 다른 공통점은 유럽 국가들의 주요 관심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북핵도 당연히 유럽의 관심사이지만, 러시아·이란 핵문제는 유럽 안보에 보다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
트럼프에 의해 깨진 2015년 이란 핵합의(포괄적 공동행동계획, JCPOA)의 당사국인 이란,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중국(이상 안보리 상임이사국), 독일 중에서 4개국이 유럽 국가인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이란 핵문제는 유럽의 이해관계와도 긴밀히 연관돼 있다.
북핵 역시 미국 안보에 직결되는데도 바이든이 러시아·이란 핵문제에 우선 접근하는 동기 중 하나는 유럽과의 동맹관계 발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동맹관계 복원의 효과가 조금이라도 더 큰 쪽에 바이든이 집중하고 있을 가능성을 반영한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
2월 중순 이후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과의 막후 접촉을 시도했다는 13일 치 <로이터통신> 보도가 있긴 했지만, 현재까지 나타난 상황을 개관하면 바이든이 트럼프에 비해 북핵 문제를 덜 중시하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그 같은 상황 인식으로 과연 북미관계를 안정시킬 수 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간의 북미관계 흐름을 감안할 때 지금 시기 역시 북한이 '도전적 태도'를 취하기에 결코 불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1993년 제1차 북·미 핵위기(북핵 위기)와 2002년 제2차 위기의 공통점 중 하나는 미국이 국제정치적으로 정신이 없을 때, 특히 중동 쪽에 신경을 쏟고 있을 때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이다. 탈냉전과 9.11테러를 계기로 미국 지도부의 심리적 여유가 위축된 상태에서 북한이 공세 태도를 취했다.
두 차례 대결은 미국이 일으킨 측면도 있지만 북한이 유도한 측면도 있었다. 제2차 위기는 2002년 10월 5일 제임스 켈리 미국 대통령특사가 '북한이 우라늄농축 핵프로그램 존재를 시인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촉발됐다. 어느 정도는 북한의 언질도 위기 증폭에 기여했던 것이다.
제1차 위기 역시 비슷한 면이 있었다. 1989년 10월 6일자 <경향신문> 기사 '불(佛) 스포트위성 고도 840km 궤도서 촬영'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북한 핵시설이 외부세계에 손쉽게 포착되는 일들이 국제사회의 대북 경각심을 키우는 데 기여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북·미 양국의 상호작용에 의해 핵위기가 발발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북한에 공격 태도를 취할 가능성?
핵문제를 놓고 벌어진 두 차례 대결만 놓고 보면, 국제질서가 어수선한 가운데 미국의 1차적 관심이 동아시아 이외 지역에 집중될 때 북한이 핵위기를 증폭시켰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점만을 놓고 보면, 지금 상황에서는 북한이 공세를 강화할 가능성이 적어 보일 수도 있다. 트럼프의 '돈 타령'으로 동맹국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지기는 했지만 바이든 취임 이후로 미국의 위상이 개선되고 있고, 유럽 국가들과 쿼드가 중국을 포위·압박하는 데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같은 정세에서는 북한이 도발을 일으키기 힘들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다소 안정돼 보이는 국제정세가 그런 판단을 유도할 수도 있다.
그에 더해, 지난 1월 제8차 노동당 당대회 이후로 북한 정권이 경제문제와 사회기풍 문제(자본주의 단속)를 부각시키며 내부 통합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북미관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는 판단을 할 수도 있다. 또 북한이 자국의 핵 군사력을 이미 충분히 과시했으므로, 더 이상 놀라지도 않을 미국을 상대로 뭔가를 쏘아 올릴 필요성이 낮아졌으리라는 계산을 할 가능성도 있다.
두 차례의 핵위기만 놓고 보면, 미국의 지도력이 회복되는 지금 단계에서는 북한이 미국을 자극할 가능성이 낮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미국 행정부 입장에서는, 북미관계가 무탈하리라는 기대감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1960년 후반 사례를 추가하게 되면 판단이 다소 달라질 수도 있다.
1960년대 후반에 북한은 상당히 공격적 태도를 취했다. 1968년 1.21 사태 및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등에서 나타나듯이, 또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 및 1969년 EC-121기 격추 사건에서 나타나듯이, 이 시기 북한은 남한은 물론이고 미국에 대해서도 공세적 태도를 보였다.
북한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는 당시의 미국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 시기에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쟁에 발이 묶였을 뿐 아니라, 1965년 자국에서 시작된 반전운동과 1968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68혁명으로 인해 도덕적 권위를 잃어가고 있었다. 미국 민심과 세계 민심이 미국으로부터 이반되는 시점에 북한이 적극 공세를 가했던 것이다.
미국, 북한 비중을 낮추는 모양새... 안정 저해 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