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훈
[넷째 마당]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이 일어났고 열흘 뒤인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와 차지철을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도 백기완은 권총 개머리판에 까여서 감옥으로 끌려갔다. 백기완은 한 달여 만인 11월 24일에 석방됐다. 마침 이날 '명동 YWCA 위장결혼식'이 열렸다. 민주인사들이 결혼식을 가장해서 서울 명동 YWCA 강당에 모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유신철폐와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감행한 것이다.
백기완은 이날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이 자리에 참석했다가 주동자로 몰렸고, 보안사령부(사령관 전두환)에 끌려가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고문을 받았다. 구속당할 때 몸무게는 82kg이었는데, 감옥에서 나올 때는 38kg이었다. 백기완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고 눈을 감을 때까지 고문 후유증을 앓았지만, 지난 2019년 11월 '명동 YWCA 위장결혼사건' 재심에서 39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시가 없었으면 난, 벌써 죽었어"
백기완은 1평 남짓한 감옥에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감옥에서는 종이와 연필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 옥중에서도 고문 후유증과 싸우며 <젊은 날> <백두산 천지> <민중과 하나 되는 그날까지> 등 해방 정서가 끓어 넘치는 옥중시를 썼다.
"죽음이 심장을 짓누르던 때였어. 고문 때문에 무릎이 축구공만큼 부었지. 거기가 이불 껍데기나 무명실이 스쳐도 아플 정도였다고. 천장에 몸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고문하는 수사관들이 주먹으로 툭툭 치고 지나가. 어떤 때는 배를 발로 걷어찼는데, 목으로, 코로 똥물이 흘러나왔어. 그걸 입으로 핥아 먹으라는 거야.
내 똥물을 혀로 핥아서 청소하라는 거야. 못 핥겠다고 하니 마구 밟는 거야. 내가 이렇게 괄시를 받으며 죽는구나…. 그게 절망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 그런데 말이야. 죽어가는 놈을 또 죽이면서 절망을 강요할 때 뭐가 생각난 줄 알아? 짓밟힐수록 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알았어. 그걸 우리말로 '서돌'이라고 해. 불씨지. 절망은 서돌이 지펴 나오기 전의 상황이야. 짓밟힐수록 불꽃이 인다, 이 말이야. 죽일 테면 죽여라, 난 서돌이 있다!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생명력, 그게 바로 서돌이지."
그 때 입으로 읊조리면서 천정에서 쓴 시 '묏비나리'는 지금도 많이 불리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태이다.
"썩어 문드러진 세상,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벅벅 갈아서 돌려라. 나는 죽지만 산자여 따르라. 나는 죽지만 살아있는 목숨이여, 나가서 싸우라는 거지. 고문관들이 '저 새끼는 정신적으로 말려 죽여야 한다'고 했어. 한번은 보안과장이 '제발 그 입 좀 다물 수 없냐'고 그러더라고. '내가 죽기 직전인데 왜 입을 다무나'라고 소리쳤어. 그럴 때 혼자서 웅얼대면서, 죽어도 죽을 순 없다, 들이받고 죽어야겠다면서 허공에 쓴 시가 묏비나리야. 입으로 써서 천장에 새겼어. '나는 비록 싸우다 죽지만 사랑하는 너희들은 앞장서 나가라' 이거야."
벗이여/민중의 배짱에 불을 질러라/장고는 몰아쳐 떼를 부르고/꾕쇠는 갈라쳐 판을 열고/징은 후려쳐 길을 내고/북은 쌔려쳐 저 분단의 먹개(벽)/제국의 불야성, 왕창 쓸어안고 무너져라/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세월은 흘러가도/굽이치는 강물은 안다/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일어나라 일어나라/소리치는 피맺힌 함성/앞서서 나가니/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 「묏비나리」 중에서
백기완은 이후 네 권의 시집을 냈다. 백기완은 "시는 쓰러진 나를 일따 세우는 웅얼거림이었고, 빼앗긴 나를 다시 찾는 나의 안간 불림이었다"면서 "나는 말이야, 시가 없었으면 벌써 죽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백기완은 모진 고문으로 감옥에서 병감정유치로 한양대병원으로 옮겨져 3개월 동안 입원했다가 1981년 석방됐다. 이듬해에는 옥중시를 엮어 <젊은 날>이라는 비매품 시집을 펴냈다. 또 전국을 돌면서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는 제목의 특강을 진행했다. 당시 신군부에 의해 수차례 가택연금을 당했지만, 1983년에도 지팡이를 짚고 전국을 순회하며 '곧은목지 이야기', '썽풀이 이야기', '이런데 그런데 이야기'등 민중들한테 용기를 주는 강연을 했다.
1984년에도 여전히 입 밖으로 통일이라는 말도 꺼내기 힘든 시절이었다. 하지만 백기완은 민중 주도 반독재 투쟁을 새롭게 조직한다는 각오로 백범사상연구소 이름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현재의 '통일문제연구소'로 확대 설립했다. 그해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도 창립했다.
1985년에는 대중강연과 함께 시집과 평론 출판 등 적극적인 저술 활동을 했다. 시집 <이제 때는 왔다>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 평론집 <거듭 깨어나서>를 출간했다. 평소 문화운동에도 열정을 보였던 백기완은 민중문화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민요연구회, 민중문화운동연합, 민족미술협의회, 반핵평화운동연합 등의 고문을 지냈다. 민주회복국민회의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으로 발전적으로 개편되면서 민통련 서울지부 의장에 취임했다. 1986년에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본부 부의장에 취임했다.
이때 가택연금 상태에서 경찰 몰래 집을 빠져나와 명동성당에서 권인숙 성고문사건 진상폭로대회를 주도하다가 6개월 동안 수배를 받았다. 수배 중 고문 후유증이 도져 극심한 고통 속에서 숨어있던 경북 왜관 파티마 요양원에서 붙잡혀 들것에 실려서 투옥됐다.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6월 항쟁의 기폭제였다. 당시 감옥에 있던 백기완은 고문 후유증이 도져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해 6월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자마자 하얀 바지저고리를 입고 6월 항쟁에 뛰어들었다. 매일 거리로 뛰어나가 "박종철, 이한열을 살려내라", "독재타도, 학살 원흉 전두환 일당타도"를 외쳤다.
6월 항쟁 이후 재야세력은 야당의 김영삼, 김대중 분열과 궤를 같이해 나뉘었다. 민통련은 1987년 10월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결정했지만, 후보단일화파와 독자후보파는 이에 승복하지 않고 민통련을 탈퇴했다. 백기완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민중대표로 추대돼 민중후보로 출마했다. 후보 백기완은 이 과정에서 노태우에 맞선 반유신세력의 승리를 위해 '민중후보 연립정부안'을 제안하며 김대중, 김영삼 두 후보를 직접 만나서 단일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김대중, 김영삼을 만나서 '가위바위보라도 해라. 둘 중 누구라도 먼저하고, 5년 뒤에 나머지 한명이 하라'고 눈물로 호소했어. 그런데 전두환, 노태우 살인마가 분열을 책동했고 이미 대통령이 된 것처럼 행동한 두 야당 후보는 민중의 역사를 배신했지."
결국 단일화에 실패하자 선거를 이틀 앞두고 "군사독재 끝장이라는 구호로 하나가 되자"고 호소하며 후보를 사퇴했다. 그 해 <통일이냐 반 통일이냐>를 출간했다. 1988년에는 박종철열사 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