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염정의 현판들물염정에는 김인후, 김창협, 황현 등 학문과 시문을 나눈 문장가들의 20개가 넘는 현판이 걸려 있어 물염정이 학문과 문학의 교유처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윤섭
호남사림들이 교유했던 주 무대가 담양의 식영정 일원이었던 것처럼 동복 적벽의 계류에 세워져 있는 물염정 역시 사림들이 교유하고 학문에 정진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적벽의 아름다운 경관을 배경으로 한 곳이었으니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최산두는 이곳에서 '제물염정(題勿染亭)' 이란 시를 통해 이곳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백로가 고기 엿보는 모습/ 강물이 백옥을 품은 듯하고 江含白玉窺魚鷺
노란 꾀꼬리 나비 쫓는 모습/ 산이 황금을 토하는 것 같네 山吐黃金進蝶鶯
유희춘의 절친인 김인후도 물염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명양주에 몹시 취하여 大醉鳴陽酒
돌아와 보니 삼월 봄이어라 歸來三月春
강산은 천고의 주인이건만 江山千古主
사람이야 백년의 손님일 뿐 일래라 人物百年賓
물염정은 병풍같이 펼쳐진 계곡의 지류에 아늑하게 들어서 있다. 신선들이 살법한 선경의 뛰어난 자연을 배경을 하고 있어 적벽에서도 이곳을 '물염적벽' 이라 부르고 있다.
물염정은 을사사화로 관직을 버리고 은둔하고 있던 송정순(1521~1584)이 지은 정자다. 그는 '티끌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물염정(勿染亭)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관계에 나아갔다가 사화의 쓴맛을 보고 자연에 귀의한 당시 사림들의 심정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사화의 풍랑속에서도 자신들의 의지를 꺾지 않고 살겠다는 당시 사림들의 의지가 느껴진다.
송정순은 1558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춘추관 박사를 거쳐 무안 현감, 구례 현감, 영암군수 등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는 유희춘과 함께 경사를 강론하였으나 을사사화를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동복에 물염정을 짓고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물염정 내부에는 류성운이 지은 '물염정기'를 비롯하여 조선 중·후기의 학자들인 김인후, 김창협, 황현 등이 남긴 20개가 넘는 시문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을 보면 이곳이 많은 사림들이 교유했던 시문학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암 유희춘은 김안국과 최산두 등 기묘사림의 계통을 잇고 있는데 스승인 김안국으로부터는 소학을 실천적 기본과목으로 확립하고 소학을 학문의 첫 번째로 여길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또한 김굉필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받은 최산두로부터는 조선 유학의 도통을 전수받아 그의 학문과 사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사화로 인해 사림들은 많은 유배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오히려 학문적 계보의 끈을 이어간 것을 보면 유배가 성리학을 추구하는 사림들에게 학문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중요한 공간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최산두는 이곳 동복에서 15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에 취한 때문이었을까? 그는 유배에서 해배된 뒤에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동복에서 살다가 53세에 눈을 감았다. 아마도 시끄러운 세상보다는 자연에 귀의해 은자로 사는 것이 마음 편하고 성리학을 하는 사림의 본분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유희춘은 동복에서 김인후와 함께 젊은 날 학문을 배우며 사림의 계보를 이어간다. 유희춘역시 나중에 을사사화를 피해 가지 못하고 20여 년 동안 유배의 길을 떠나야 했던 것을 본다면 청년기 유희춘이 학문과 자연을 접하며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보냈던 시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방랑시인 김병연의 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