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
마음산책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은 지난 2016년부터 3년간 제철소 철강노동자로 일한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의 회고록이다. 신입 직원을 뜻하는 '주황 모자'에서 수습 딱지를 뗀 '노란 모자'를 쓰기까지, 그가 제철소에서 마주한 현실과 그곳의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변화에 대해 기록했다.
그가 바라본 제철소는 그야말로 '밤과 낮', 그러니까 '명과 암'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제철소 노동자들은 "결혼과 이혼, 생일과 졸업, 질병과 죽음을 겪으면서도" 늘 일했다. 살기 위해 일하다 돌연 죽음을 맞는 건 제철소에서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에 걸린 게시판에는 늘 온갖 부고 기사가 걸렸고, 식탁엔 아무렇지 않게 장례식 안내문이 놓였다.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죽음을 말했고, 제철소의 모든 공간은 거대한 추모의 장이었다.
... 제철소에서 죽음은 기이하기 짝이 없는 장소들에서 추모되었다. (중략) 직원들은 죽은 모든 동료를 가족처럼 열정적으로 기억했다. 끔찍한 이야기를 충격요법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야기들은 밥벌이를 위해 제 목숨을 내놓은 모든 삶을 기억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더 중요하게, 그 이야기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냉엄한 진실을 말하는 방식이었다. - 166쪽
이처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제철소에서, 그는 단순히 '쇠락한 공업지대의 철강노동자'로 뭉뚱그려지는 이들의 얼굴과 노동을 구체적으로 그러낸다.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에는 저자가 동료들에게 느끼는 동질감과 애정이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성노동자가 '남자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마는 남성중심적인 제철소의 문화, 일부 노동자들의 보수적인 정치관, 불합리한 업무 관행, 무너져 내리고 있는 철강 산업에 대한 날카로운 현실 인식이 담겨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이 같은 한계를 정확하게 직시하면서도 끝내 이곳의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연대의 가능성을 포기하진 않는다. 함께 일하는 한 크레인 기사가 느닷없이 골드바흐에게 "진보주의자냐, 나는 미쳐 날뛰는 페미니스트가 싫다"고 말했을 때, 그는 목소리를 떨면서도 자신이 바로 그 '미쳐 날뛰는 페미니스트'임을 정확하게 밝힌다.
페미니스트들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크레인 기사에게 같은 대학 남학생들에게 당했던 성폭행의 경험이 자신에게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 저자의 말에, 크레인 기사는 진심으로 유감을 표하며 예상치 못한 말을 내놓는다. 자신도 어렸을 때 성추행을 당했다는 고백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안됐어." 기사가 말했다. "진심이야, 그게 어떤 건지 나도 알거든." "선배님이 안다고요?" 말할 것도 없이 비난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그게 어떤 건지 정말 안다고요?" "글쎄," 그가 답했다. 내 말투에 그가 체념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 털썩 기대앉았다. "어쩌면 다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도 어렸을 때 성추행을 당했어. 믿었던 사람한테 성추행당했는데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었지. 남자는 그런 엿 같은 일로 울면 안 되거든. 그냥 받아들이고 삭이면 그만이야. 그래서 그렇게 했지. 나혼자서 말이야."
크레인 기사가 말을 마치자 이번에는 내가 당혹감에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당신이 문제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임금격차의 원인이었다. 여태 평등권 수정헌법이 통과하지 못한 것도 당신 때문이고, 강간문화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도 당신 때문이었다. - 384쪽
그 대화를 조용히 되새기던 저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같은 학교 남학생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딸이 신고를 주저하고 있을 때, '누구도 너의 심장을 빼앗아갈 수 없다'며 황금 열쇠를 쥐어주고 용기를 전하던 아버지. 그러나 여성을 모욕하고, 소수자를 혐오하는 데 거리낌 없던 트럼프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던 아버지. 그가 크레인 기사와의 대화에서 발견한 건, 마치 대척점에 서 있는 것만 같은 타인과 접점을 찾고, 언젠간 연대할 수 있을 거라는 일종의 '가능성'이었다.
저자는 이 같은 연대의 가능성을 짓밟고, '이민자나 난민과 같은 소수자들이 당신의 일자리와 경제적 이득을 빼앗아간다'고 세뇌하며, '몰락이 유일한 정체성'이라고 믿게 된 러스트벨트 노동자들의 분노와 복수심을 촉발하는 것이 바로 트럼프와 같은 정치 세력의 '전략'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저자가 직접 목격했듯, 흔히 '트럼프가 당선되는 데 기여한 블루칼라 노동자'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은 자신이 경험한 문제를 사회의 의제로 연결시키는 데 미숙할지언정, 여전히 '타인을 향한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강인한 회복력과 자부심을 가진 노동자들이기도 했다.
저자는 말한다. 사람들은 러스트벨트가 경제적으로 '실패'했다고 손가락질 하지만, 이들은 분명 그 실패를 넘어설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고.
제철소의 불꽃은 러스트벨트를 특징짓는 일종의 침체를 상징했다. 우리는 혁신하지 못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빠르게 성장하는 기술 산업을 따라가지 못했다. 클리블랜드는 슬픈 이야기 위에 지어진 도시였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는 클리블랜드가 재기의 도시이기도 하다는 걸 몰랐다. (...) 우리는 패배했을지 모르나 가장 잘하는 것을 해왔다. 우리는 조용히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172쪽
그래서일까, 3년 동안 서서히 '두려움이 사라진 철강노동자'로 성장한 저자도 그간 불가능하다고 포기했던 일들에 다시 도전한다.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왔던 양극성 기분장애를 다스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치료에 나서고, 뒤늦게 학위를 따며, 전공을 살려 대학 교수직에 지원한다.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된, '철강노동자'라는 정체성을 여전히 잃지 않은 채로.
우리는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