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가난의 문법>
푸른숲
윤영자는 어디에나 있지만 좀처럼 가시화되지 않는 '재활용품 수집 노인', 그 중에서도 여성노인을 대변하는 하나의 얼굴이다. 도시사회학 연구자 소준철은 책 <가난의 문법>에서 이 '윤영자'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재활용품 수집 노인의 삶을 조명했다. <가난의 문법>은 윤영자씨의 일상을 시간 단위로 쪼개 설명하는 가상의 시나리오, 그리고 재활용품 수집 노인의 생애와 노동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교차하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저자가 이 책에서 재활용품 수집 노인, 그 중에서도 여성노인을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낸 건 이들이 단순히 '흔히 상상할 수 있는 모델'이기 때문이 아니다. 저자는 "가난한 여성노인은 이전의 한국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여성 생애의 목표를 남편에 대한 내조와 자녀의 양육으로 삼게 하고, 따라서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질 기회를 갖지 못하게 했던 결과"라는 설명이다.
즉, 여성노인들이 가난해진 원인을 단순히 개인의 의지와 노력, 능력 등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저자는 한 개인이 재활용품 수집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게 되는, "우연적이지만 필연적이었던 구조들"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이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북아현동과 충현동에서 만났던 노인들의 이야기를 한데 모아 '윤영자'라는 한 명의 보편적인 인물을 만들었다.
윤영자의 삶은 다름 아닌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서며 살아왔던 이 시대 노인들의 보통 모습이다. (p.131)
제도의 바깥으로 밀려난 '윤영자들'
책 속에서 윤영자는 주택도, 개인연금도, 전문 기술도, 직업도 없지만, 부양이 필요한 가족, 그 중에서도 큰돈이 들어가는 질병을 앓고 있는 남편이 있는 인물이다. 윤영자에게는 육 남매나 되는 '부양의무자'들이 있지만, 이들에겐 부모까지 경제적으로 건사할 '부양 능력'이 없다. 하지만 이들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윤영자는 한때 기초노령연금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결국 윤영자는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데, 숙련된 기술이 없고 경력이 변변찮아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한국사회는 윤영자와 같은 65세 이상의 노인들은 '일할 수 없는 존재' 혹은 '일하지 않는 존재'로 치부한다. 국가에서 진행하는 노인일자리사업이 있긴 하지만, '알바' 수준에 그치는 한시적이고 시혜적인 일자리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경쟁이 치열해 아무나 할 수 없다.
결국, 늙어서도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윤영자'들'이 서게 되는 자리는 "제도의 바깥, 혹은 빈틈"이다.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은 환경미화원이나 쓰레기 수거 대행업체 직원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 놓인 자잘한 폐품을 "낚아채", 그것을 고물상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노인들은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있지만, 이들은 '청소부'가 아니다. 버려진 것들을 주워 돈을 벌지만, 그 돈은 쓰레기를 버린 이들이 주는 게 아니다. 노인들의 행위는 같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청소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게 아니라, 재활용 산업에서 발생하는 돈 일부를 스스로 취하고 있을 뿐이다. (p.207)
이들은 분명 자원순환 정책과 재활용 산업의 틈새를 채우고 있지만, 누구도 이 '변종 직업'을 책임지진 않는다. 손수레를 끌다 교통사고가 나거나 묻지마 폭행을 당해도, 고물상이 노동 시간과 노동 강도를 고려하지 않고 터무니 없는 가격을 불러도 모든 건 개인이 감내해야 할 '불운'으로 여겨진다. 그런데도 "주인 없는 재활용품을 둘러싼 외로운 노인들 간의 경쟁은 계속해서 심화되는 중이다."
한 사람의 생애 역시 '역사'다
그렇다면 이 기이한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우리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걸까? 저자는 이 속에도 일종의 '착취' 구조가 존재한다고 단언한다.
이 생태계를 유지하는 건, 노인들의 일과 그 안의 경쟁뿐만은 아니다. 이 생태계는 보다 젊은 세대들 혹은 보다 부유한 계층의 책임을, 더 나아가 제품을 제조하는 업체의 의무를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노인은 젊은 세대와 부유한 계층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는 셈이다. (p.90~91)
뒤이어 저자는 "기술적 진보와 기업조직의 변화, (소비자의) 한 번 쓰고 버리는 물건을 사용하는 습관, (불완전한) 도시 당국의 쓰레기 수거 시스템, 그리고 생산자가 생산품의 처리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상황이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을 존재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저자는 이 같은 현실을 공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한다. '자원협동조합'과 같이 지자체 등이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시도했던 다양한 사업들을 공들여 소개하고, 현재 복지 제도의 빈틈을 메울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한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노인이 일하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고민은 도시의 노인이 잘 늙고, 잘 죽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까지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