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가난의 문법>
푸른숲
이 책을 읽고서 나는 작년의 그 할머니가 떠올랐다. <가난의 문법>은 사회학자인 작가가 서울시 북아현동 고지대에 사는,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노인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관찰하고 취재한 기록물이자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도시노인의 생태보고서'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저자는 노인, 그 중에서도 도시의 여성 노인에게 주목한다.
윤영자라는 재활용품 수집 여성노인의 하루
1945년대 전남 해남에서 출생한 '윤영자'라는, 저자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의 삶의 하루를 나누어 살피며, 아울러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의 현실과 상황,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짚어본다. 그들이 왜 재활용품 수집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지, 왜 도시의 '가난한 노인'이 될 수밖에 없는지 '가난의 문법'을 밝히고 있다.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노인들이 그런 일과 생활을 하게 된 원인이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p.13
윤영자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우리 주위에 충분히 있음직한 현실의 인물이기도 하다. 40년대 시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업한 뒤,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다. 서울에서 화장품 판매원, 부녀회장 등 닥치는 대로 부업을 하며 가계를 꾸려간다.
자녀들을 다 출가시키고 살 만하다 싶었을 때 IMF 등으로 사업난을 겪은 자녀들에게 사업비를 대주느라 본인들의 단독주택도 팔아버린다. 늙어버린 지금, 하루하루 살기 벅찬 자녀들에게 부양을 기대할 수도 없고, 마땅한 일자리를 찾을 수도 없고, 이렇다 할 재산도 없다. 윤영자는 그렇게 재활용품 수집을 위해 거리로 나서게 된다. 이게 가난의 문법이다. 자,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물론 모든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의 삶이 이런 경로를 밟았다고 볼 수 없다. 모두가 이런 인생을 산 것도 아니고, 이 가난의 문법에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노인들의 '가난'은 우리 사회, 역사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 가난은 더 이상 한 개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것.
'국가 및 사회와 간접적 영향을 주고받은 한 사람의 생애 역시 지금의 역사다...(중략)...다르게 보면 우리가 '가난한 삶으로 이끈 책임'이라며 낙인찍었던 그녀의 결정과 행동은 각 시대의 처지에 대한 영자 씨 나름의 생존법칙이었던 것이다.' p. 128
재활용품 수집이 쉬엄쉬엄 운동 삼아 하는 일이라고?
쉬엄쉬엄, 노느니, 운동 삼아 일한다는 재활용품 쓰레기 수집이 왜 노인들에게 문제가 되는 걸까?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노인들의 재활용품 수집에 대해 그리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간혹 길거리에서 커다란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들을 보면 '힘들겠다' '위험하겠다'는 생각만 단편적으로 했을 뿐이다.
그리고 작년 여름, 그 할머니의 덜덜거리는 대형 카트를 끌면서 직접 체험한 노동의 수고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서 생각한 건, 이 일은 노인의 일자리로는 너무 가혹하다는 사실이었다. 절대 '노느니 운동 삼아' 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저자는 재활용품 수집으로 '노인들이 일시적인 금전을 취할 수는 있겠으나, 그들의 생활 자체가 개선되지는 않는다'며 '거칠게 말하자면 노인은 젊은 세대와 부유한 계층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증가한 플라스틱, 재활용품 쓰레기는 노인을 착취하는 일을 심화시킨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재활용품 수집이 제도의 바깥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문제(교통사고, 폭행 등)가 발생했을 때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책임 주체가 명확하지 않다는 허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재활용품 쓰레기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노인들 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 그리고 잘못된 정보로 인한 공동체의 와해, 노인들에게 가해지는 육체적인 고통과 위험, 폐지 값을 정하는 경제 원리, 고물상이라는 비공식적 공간의 모순, 노인의 신체 속도나 형편에 맞지 않는 도시의 설계 등 나로서는 미처 생각지도 하지 못했던 여러 문젯거리들도 함께 제기해놓았다. 도시 노인의 빈곤이 결코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사회 문제가 얽히고설키어 있는 유기체였던 것이다.